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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초원에서 “미국 교육의 맛”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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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천방지축으로 뛰놀 아이와 함께 해줄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토요일 오후였다. 야구 방망이, 야구 장갑, 축구공, 농구공 따위가 든 커다란 스포츠가방을 지고 아이 학교 운동장으로 나서면, 아이의 기대감은 터질 듯 느껴졌고 그만큼 아빠는 미안해졌다. 모래 운동장에서 한 시간 남짓 뛰어노는 게 아이의 거의 유일한 에너지 발산 기회였다. 그나마 나의 금요일 저녁 약속이 진하게 이어지면, 초등학생 저학년 사내아이의 짐승 같은 에너지는 쏟아낼 곳이 없었으리라. 맞벌이 부모가 퇴근하기까지 전전하던 동네 학원 중 태권도장에나 가야 땀을 뻘뻘 흘리며 놀다 오지만, 그 좁은 공간에 갇혀야 비로소 동네 친구를 사귈 수 있는 한국의 아이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미국 도착 직후 정착을 도와주는 지인이 아이 축구 등록은 했냐고 물어왔다. 미국 교육의 맛을 보려면 아이 축구 응원을 다녀봐야 한다는 말도 보탰다. 미처 알지 못했던 터라 여기저기 찾아보니 내가 살고 있는 조지아주 오코니카운티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거나 OCPRD(오코니카운티 파크 앤 레크리에이션 디파트먼트) 사무실로 찾아가 등록해야 했다. 카운티에서 아이들의 방과후 운동 프로그램을 총괄 관리·운영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방과후 프로그램이 있지만 개별 학교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학교마다 프로그램 종류나 수준 등이 제각각이다.


문제는 운동 프로그램 등록기간이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무척 아쉬웠지만 축구할 기회를 놓친 아이는 더욱 낙담했다. 연수지에 도착한 7월 중순이 등록 기한이었다. 이곳에선 신학기가 8월 초에 시작하고, 때문에 축구 등 방과후 운동 프로그램이 더 일찍 시작하는 것 같다. 8월 초에 시작한 시즌은 10월 말 끝나고 반바지 입고 운동하는 야외 활동이 어려운 겨울 시즌엔 실내 운동인 농구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다음 시즌이 올 때까지 그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썼다. 여러 사정상 기한을 모르고 있었으며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말도 다소 과장스럽게 보탰다. 다행히 머잖아 사무실로 찾아오라는 답신이 왔고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줬다. 마침내 1주 정도가 지나서 축구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등록 비용으로 65달러를 냈다. 9~10(U10) 사내아이들 13명으로 이뤄진 팀 이름은 Panthers였다. 이밖에도 Jaguars, Wildcats, Mustangs, Wolverines 7~8U10 팀이 더 있었다. 아이들끼리 동네 축구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지만 상당히 체계가 오밀조밀하게 잘 갖춰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오코니 베테랑스 파크의 넓고 푸른 잔디 운동장은 형형색색 축구복을 입은 아이들과 피크닉 의자에 앉아 있는 부모들로 가득했다. 주차장도 빈 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주말이면 다들 집 안에서 텔레비전만 보는지 타운하우스 단지 안이 더욱 한산했는데, 다들 아이들 축구하는 데 오는가 싶은 생각조차 들었다.


일주일에 월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 아이들이 모였다. 월요일은 저녁 시간대에 축구 연습이 이뤄졌고 토요일은 보통 낮에 운동 시간이 마련됐다. 2~3주 연습을 하고 난 뒤로 토너먼트전이 벌어졌다. 운동을 하는 아이들이나 응원에 나선 부모들뿐 아니라 코치와 심판들 모두 내겐 적잖이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전후반 각 25분씩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사뭇 진지했다. 개중에는 어린이 메시나 호나우두처럼 날쌔고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경기 중 먼 산을 쳐다보며 실수를 연발하는 둔한 아이들도 있었다. 아들 녀석은 한국에서 방과후 수업으로 축구를 했고 토요일마다 나와 축구공을 주고받으며 놀았지만, 그래서 만에 하나 한국에서 온 어린이 박지성이라는 찬사라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솔직히 없지 않았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잔디구장이 익숙치 않아서였을까. 실수를 연발하는 아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 치솟았다. 공뺏기 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라, 상대편 선수도 마크해야 하지만 공이 어디로 가는지 집중해야 한다 등등, 경기가 끝날 때마다 잔소리를 쏟아냈다.


머지않아 내 태도가 부끄러워졌다. 아빠 눈에 너무나 못해 보이는 아들녀석에게 코치는 칭찬만 늘어놨다. 나는 다른 선수들의 이름도 제대로 몰랐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부모들은 경기 때 내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응원했다. 경기가 진행되면서 몇 차례 수비수로 상대편 공격 흐름을 끊어내자, 아이는 시즌 내내 ‘best defender’로 불렸다. 잘 하는 아이는 잘 하는 아이대로 못하는 아이는 또 그 나름대로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고 할까.


운동장에는 점수를 따로 게시하는 곳도 없었고 토너먼트전인데도 승패나 순위를 따로 공표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도록 배려하면서 규칙을 익히고 서로 배려하고 협동하는 것을 가르치되 아울러 아이들이나 부모나 운동에 재미를 붙이도록 잘 짜여 있었다.


아이들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또 다른 원칙이었다. 한참 공을 차며 각축전을 벌이다가도 한 아이가 넘어져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키면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축구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국이었다면 넘어진 아이의 부모가 경기장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을까? 전적으로 경기장 안에서 아이가 다치거나 문제가 생기면 코치가 책임진다. 코치는 넘어진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고 선수를 교체하거나 심판에게 경기를 속개하라고 요청한다. 최소한의 안전장구 없인 선수로 뛸 수도 없다. 정강이 보호대를 준비해 가지 않았다가 심판의 지적으로 코치의 아들에게 빌려서 아이에게 착용시켰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에게 축구를 하고 싶지만 껴주지 않아 속상해 하는 여자아이와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방과후 프로그램 축구에 으레 남자아이들만 등록시킨다는 것이었다. 학부모의 항의로 여자아이가 축구를 할 수 있게 됐고 그 여자아이는 또래 어떤 다른 남자아이보다 뛰어난 선수였지만, 그리 오래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코치도 여자아이를 따로 대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뿐더러 남자아이들 틈에서 즐겁게 축구를 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여기선 아예 처음부터 남자팀과 여자팀을 따로 꾸린다. 사내아이들이 축구하는 곳 옆 다른 경기장에선 늘씬한 여고생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 경기를 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만 해도 실력이 상당해 보였다. 어릴 적부터 해온 솜씨가 아니라면 슛이나 패스 실력이 그 정도이긴 어려울 것이다.


선수들이 땀 흘리는 경기장 곁에선 또다른 진풍경이 펼쳐졌다. 엄마 아빠와 함께 형제자매의 축구경기 응원에 나섰을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들이 곡예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잔디밭에서 맨발로 긴머리를 휘날리며 물구나무서기와 덤블링을 하고 다리를 찢는다. 곤봉을 던지고 리본을 흔드는 아이들도 많았다. 알고 보니, 축구나 풋볼, 야구 프로그램뿐 아니라 치어리딩을 가르치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오빠나 동생이 축구하는 곁에서 여자아이들은 치어리딩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지 않을 수 없어 보였다.


그 많은 팀의 코치는 누가 하는 걸까? 알고 보니 모두 자원봉사자다. 건축업자, 의사, 교수 등 또래 자녀를 둔 아버지들이 주로 코치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운동장에 나와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이 꽤나 즐거워 보였다. 축구 전문가들도 아니다.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을 카운티로부터 간단히 교육받는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들 역시 어린 시절 똑같이 축구공을 차고 농구공을 던지며 자랐을 게 아닌가.


시즌이 끝날 때가 되자 학부모들끼리 이메일을 돌려 코치에게 기프트카드를 주자고 제안했다. 1인당 5~10달러가량 갹출해 선불카드를 코치에게 선물하는 게 관행인 듯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 날엔 아이들을 위한 파티를 열어주고 작은 메달이나 트로피도 나눠줬다. 파티라고 해봤자 음료수에 과자, 작은 케잌 한 조각씩을 앞에 두고도 아이들은 신이 났다. 부모들은 음료수, 스넥, 케잌, 접시, 포크 등을 나눠서 준비했을 뿐이다. 한국에 돌아간 뒤 아이는 그 무엇보다 축구를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