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제삿밥, 미술관보다 미술관 정원
미술관이 좋은 것은 도착 순간부터 전시를 보고 나올 때까지의 모든 과정이 선사하는 공감각적 경험 때문이다. 정문에 들어서 미술관으로 향하는 높은 계단을 올라갈 때, 사람 키의 몇 배가 되는 육중한 철문을 지나 로턴다(rotundaㆍ원형 홀)에 자리한 메인 작품을 만날 때, 그리고 미술관 특유의 종이 곰팡이 물감 냄새를 맡을 때…. 쾌감에 공백이 없다. 미술관 전체가 작품인 셈이다.
제사보다 제삿밥일지 모르지만 그중에서도 전시 관람 앞뒤에 만나는 미술관 정원은 ‘예술 감상’이라는 경험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장치다. 수도 워싱턴DC가 가까운 미국 북버지니아에 거주하며 찾은 미술관 가운데 정원이 아름다운 미술관 세 곳을 소개한다.
버지니아 파인 아트 미술관 본관과 별관 사이에는 조각 공원이 마련돼 있다.
탁 트인 잔디밭은 전시 관람객들의 휴식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다.
▦ 버지니아 파인 아트 미술관
버지니아 주도 리치먼드에 위치한 버지니아 파인 아트 미술관(Virginia Museum of Fine ArtsㆍVMFA)은 주 정부가 운영하는 공립 미술관이다. 1936년 개관한 이 미술관은 현대를 비롯한 시대별 서양 미술 작품과 더불어 고대 헬레니즘 시대와 이집트의 유물, 아시아 예술품까지 보유, 대규모 컬렉션을 자랑한다. 전시장의 규모가 커 한나절을 다 보내도 상설전을 전부 훑기 어렵다. 그 유명한 모네의 ‘수련’에도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보고 나면 밖으로 나오고 싶어진다.
별관과 본관 사이, 꽤 규모가 큰 잔디밭이 펼쳐지고 중간 중간 의자와 조각이 서 있는 정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더운 여름 더위를 식혀 줄 분수도 빼놓을 수 없다. 자리를 펴고 햇볕을 즐기는 가족 단위 방문객은 물론, 반려견과 함께 나온 주민들도 눈에 띈다.
‘로빈스 조각 정원(Robins Sculpture Garden)’으로 불리는 이 공간의 한편에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출신 작가 하우메 플렌사의 ‘클로에(Chloe)’가 자리잡고 있다. 눈을 살짝 감은 소녀의 두상인 클로에는 높이가 24피트(7.3미터)에 달하는 거대 조각이다. 그래서 미술관 근처라면 어디에서나 보인다. 2017년 미술관 커미션(창작 의뢰) 작품으로 설치된 뒤 VMFA를 대표하는 조각으로 자리잡았다. 대부분 무료인 버지니아 공립 미술관처럼 VMFA도 무료여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이 정원은 일요일이면 방문객으로 붐비는데, 야외 요가를 즐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명상하듯 눈을 내리깐 소녀 두상 조각은 하우메 플렌사의 ‘클로에’다.
딱히 조각 공원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나무 아래 놓인 의자에서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을 들고 앉아 있으면 한나절 내내 미술관을 걸어 다니며 쌓였을 피로가 풀린다. 차로 2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오느라 들인 품을 부지런으로 만회하려는 부모를 따라다니느라 제법 고역이었을 북버지니아 초등학생 아이에게는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 글렌스톤 미술관
메릴랜드주의 사립 미술관 중 최고로 꼽히는 글렌스톤 미술관(Glenstone Museum)은 정원을 빼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미술관 입구에서 전시동까지 10여 분 동안 걸어가는 것부터가 예술 경험의 시작이다. 총 300에이커(약 121만 제곱미터ㆍ37만 평)의 부지에 산책로, 개울, 목초지, 숲 등이 펼쳐지고 야외 조형물이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다. ‘PWP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설계한 이 정원은 하나의 생태계다.
정원 안에 미술관이 숨듯 자리잡았다.
산책길에 만나는 예술 작품도 좋지만, 미세먼지 없는 야외 활동이라 산책 자체가 더 좋다.
글렌스톤 미술관 전시동으로 가는 길에 만난 제프 쿤스의 ‘스플릿 로커(Split-Rockerㆍ2000)’.
꽃이 피는 5월부터 10월까지 사이가 가장 아름답다.
미술관은 나무를 심어 숲을 확장하기도 하고, 개울과 호수를 관리해 건물에서 필요한 물을 쓰기도 한다. 광활한 목초지는 거친 자연 그대로다. 깔끔한 잔디밭에 비싼 조각이 놓이는 일반적인 미술관의 조각 공원에 비하면 방치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런 무심함조차 세심한 조율의 결과물이다. 전시동에서 외부 목초지를 바라보면 근경과 원경이 한 프레임에 담긴다. 관객이 실내 미술 작품보다 오히려 자연에 빠지는 일이 이 미술관에서는 흔하다.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심한 날은 바람이 심한 대로, 산책로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자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예술품이다.
글렌스톤 미술관은 전시장이 여러 개라 그것만 둘러보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이 걸리는데, 정원까지 모두 돌아보려면 적어도 4시간은 잡아야 한다. 매달 1일 오전 10시에 그 다음 달 예약을 받는다. 통상 3분 안에 오전 시간대 예약이 마감되고, 10분 안에 한 달치가 전부 마감되기 일쑤지만, 취소 표가 종종 나오기 때문에 미술관 웹사이트를 들락거리다 보면 행운이 오기도 한다. 무료지만 12세 미만 아동은 입장 불가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BTS의 리더 RM이 다녀간 곳으로도 유명하다.
리처드 세라의 ‘실베스터(Sylvesterㆍ2001)’.
▦ 허시혼 미술관
스미스소니언은 박물관 19곳과 도서관 21곳, 동물원, 천체 관측소, 열대기후 연구센터, 자연환경 연구센터, 과학교육원 등 많은 기관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 예술ㆍ문화ㆍ과학 교육기관이다. 허시혼 미술관(Hirshhorn Museum)도 스미스소니언 산하인데, 워싱턴DC의 상징적 공간인 내셔널 몰에 자연사 박물관, 스미스소니언 재단 등과 함께 위치한다.
‘모던 앤드 컨템퍼러리 아트’ 미술관으로 규정되는 이 미술관은 현대 미술 거장들의 개인전이 곧잘 열리는 곳이다. 한국의 단색화 작가 이우환이 코로나19 대유행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 이곳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후 1년 넘게 개관과 휴관을 반복하다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다시 전시를 재개했다. 올 4월에는 ‘땡땡이 호박’으로 일반 대중에게도 유명한 일본 출신 현대 미술 거장 쿠사마 야요이의 개인전이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다.
지면 아래 숨어 있는 허시혼 미술관 조각 공원.
너른 잔디밭 대신 자갈길과 화초, 나무가 빼곡한 정원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헨리 무어 등 유명 조각가의 작품이 숨바꼭질하듯 숨었다.
드럼 형태의 원형 건물인 허시혼 미술관은 중심부를 비워 중앙 정원으로 활용하는데 현재는 공사 중이라 비어 있다. 하지만 미술관 내 중정이 다가 아니다. 난해한 현대 미술을 감상한 뒤 밖으로 나오면 조각 공원을 만나게 된다.
터널을 통해 미술관과 연결된 이 조각 공원은, 내셔널 몰 잔디밭에서 보면 한 개 층 정도 지면 아래로 꺼져 있다. 그 덕에 반드시 조각 공원을 봐야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는 이상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실제 매년 이 미술관을 찾는 관객 수가 100만 명에 이르지만 조각 공원 관람객은 15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계단으로 내려가면 산책로가 펼쳐진다. 벚나무 등 곳곳에 심긴 수목의 그늘은 따가운 여름 햇볕으로부터 방문객들을 보호하는 방어막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헨리 무어 등 조각 대가들의 작품이 나무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은신하고 있다.
허시혼 미술관 조각 공원이 새로 단장한다.
2024년 공개될 새 모습이 담긴 히로시 스기모토의 개념도.
허시혼 미술관 홈페이지
2년 뒤인 2024년 개관 50주년을 맞는 허시혼 미술관은 얼마 전 조각 공원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일본 작가인 히로시 스기모토에게 맡겼다. 6,000만 달러(734억 원) 규모의 커미션으로, 중간 연못을 키워 박물관 파사드(facadeㆍ건물 정면)의 창문과 발코니가 이 연못에 반사되며 미술관이 확장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게 스기모토의 복안이다. 야외 갤러리 역할과 일반 관람객 접근성을 강화하겠다고도 그는 밝혔다. 올 하반기에 착공해 2024년 새로 단장된 모습을 공개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