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하면 이른바 ‘자유방임’의 본고장이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아담 스미스가 스코틀랜드에서 <국부론>(1776년)을 펴내 훗날 ‘자유방임’ 이론을 전세계에 퍼뜨리지 않았던가?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영국에 사는 동안 일상생활 속에서 ‘자유방임’을 자주 접했기에 관련된 몇 가지 내용을 두서없이 적어본다.
올해 초 겨울, 몇 년 만에 영국에 눈이 내렸다. 폭설도 아니고, 약 5cm 정도 내린 것 같은데 대부분의 학교가 문을 닫았다. 겨울철에 눈이 내리면 폭설 여부를 가리지 않고 학교가 문을 닫기 일쑤라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겨울철에 눈구경하기 쉽지 않은 영국이다 보니 오랜만에 눈이 내리면 학교에 오지말고 대신 집에서 가족들과 눈사람 만들면서 즐겁게 놀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날 오전에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대학교로 가는데, 도로에서 놀고 있던 10대 아이들 대여섯명이 갑자기 야구공만한 딱딱한 눈뭉치를 만들어 버스 유리창에 마구 던지는 게 아닌가? 내가 앉은 좌석의 유리창 쪽으로도 돌멩이 같은 눈뭉치가 몇 개 날아왔다. 투수가 던지는 야구공 정도에 맞먹는 속력이다보니 유리창이 깨질 것 같아 황급히 뒷자리로 피했다. 어떤 애들은 달리고 있는 버스의 운전석 정면 유리창을 정조준해 마구 던져댔다. 온 힘을 다해 던지는 무서운 속력의 눈뭉치였다. 장난치고는 너무 심하고, 몹시 위험한 짓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대 중년쯤 돼보이는 운전기사는 아랑곳없이 버스를 계속 주행했고, 버스 승객 누구도 아이들을 혼내려 하지 않았고, 계속되는 위험한 행동을 제지하려고 나선 사람도 없었다. 운전석 유리창에 눈뭉치를 던져낸 녀석도 도망치기는커녕 입가에 웃음을 문채 눈뭉치를 또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대부분의 영국 초등학교가 아이들을 놀리기만 하고, “공부는 알아서 하라”고 자유방임 식으로 풀어놓는다고 한다. 이런 교육환경에서 크고 있는 아이들인데다 오랜만에 구경하는 눈이다보니 아이들의 이런 위험한 행동까지 어른들이 용인해주는 것일까?
또 한가지, 영국에서 전기, 가스, 그리고 수도요금 청구서를 보면 사용량 항목에 ‘estimate’와 ‘customer meter reading’ 두 가지가 기재돼 있다. 4인 가족이라면 업체에서 한달 또는 분기별 사용량을 4인 가족을 감안한 추정치(estimate)로 계산해 요금청구서를 발송한다. 즉 실제 사용량보다 적을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는데, 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고 생각되면 본인이 자기 집의 계량기 미터를 체크해 업체에 통보(customer meter reading)해주면 된다. 그러면 업체는 이를 반영한 수정 청구서를 다시 발송해준다. 이 때 업체에서는 본인이 통보한 사용량을 그대로 믿어준다. 물론 간혹 업체 직원이 나와서 직접 사용량을 체크해 가기도 한다. 이 역시 자유방임의 한 측면이 아닐까?
이처럼 영국에서 개인들의 각종 행위를 ‘자유방임’에 맡겨놓는 것 같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인들의 일상 행동을 규율하는 ‘규정’도 많다. 모든 예약과 계약에는 일종의 계약 조건인 ‘terms and conditions’가 적용된다.
흥미로운 건 영국이 ‘자유방임’의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권리장전’의 나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런던 시내의 트라팔가 광장 쪽에서 피카딜리서커스 쪽으로 걸어다가 보면 작은 골목이 있는데, 골목 벽에 작은 글씨로 써놓은 안내문이 붙어있다. ‘영국 교통법에 따라 공공의 ‘(보행)권리’가 적용되지 않는 도로가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자유방임 철학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지만, 사유지의 경우에는 행동에 대한 엄격한 제약이 적용된다.
일전에 우리 집 아이들이 주택가 도로에서 공을 차고 놀다가 공이 옆집 현관문 앞 작은 정원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우리집 큰 애가 그 공을 잡으러 그 집 가든에 들어가자 옆집 아저씨가 대번에 문을 열고 나와서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여기는 우리 집 가든이니 공을 차고 놀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충고해 내가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기도 했다.
개인들의 행동을 자유에 맡겨놓지만 ‘룰’을 지키지 않으면 큰코다치는 나라가 또한 영국이다. 영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가끔씩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영국에서는) 한번 걸리면 작살난다”는 표현이다. 영국에 처음 온지 몇 주 안됐을 무렵의 일이다. 런던 시내에 있는 어떤 작은 호텔에 투숙했는데, 호텔 앞 도로에 세워진 주차안내판을 보니 이곳은 ‘Residences only(거주자 한정)’ 구역으로,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근처 주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차가 허용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오후 6시부터 아침 8시30분까지는 도로상에 무료로 주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저녁에 차를 그 도로상에 세워놓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하이드파크에가서 산책을 하고 나서 돌아오니 아직 8시였다. 그래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손목시계를 계속 주시하면서 차를 빼기 위해 그 도로로 갔다. 시계는 8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분 지났는데 벌써 주차 위반 딱지를 붙였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착해보니 웬걸 주차 단속하는 Warden 한 명이 내 차 앞 유리창에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게 아닌가? “영국 온지 며칠 안돼서 잘 몰랐다, 겨우 3분 늦었다, 봐달라”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어쩔 수 없다”는 말과 노란 주차 위반 스티커만 남기고 그는 가버렸다.
딱지를 펼쳐 보니 벌금액이 무려 120파운드(24만원)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10일 안에 납부하면 절반인 60파운드만 내면 된다는 안내가 덧붙여져 있었다.
이날 저녁에 내가 살고 있는 Cardiff로 돌아와 인터넷을 뒤졌다. 벌금 60파운드를 그냥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런던을 관할하는 웨스트민스터 시청의 교통당국 홈페이지는 아니지만, 다른 영국의 교통당국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아침의 경우 주차 금지가 개시된 이후 5분 정도는 시간 여유를 준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5분 정도의 차이라면 주차위반 스티커를 붙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장 ‘Dear Westminster city council …’ 어쩌고로 시작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벌금을 취소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편지에 쓴 해명 내용은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아침 5분 이내에는 스티커를 안 붙이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안다. 둘째, 단 3분 차이로 스티커가 발부됐다. 셋째, 영국 온지 며칠 안돼 잘 몰랐다(영국 입국날짜가 찍힌 여권 복사본을 첨부했음). 넷째, 나는 그 도로상에 있는 호텔 투숙객이었다(호텔 숙박 증빙서류 첨부).
1주일 만에 답장이 왔다. 간단했다. “당신 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벌금은 정당하게 부과됐다. 너의 요청은 거절됐다.” 영국에서는 사실상 고속도로를 제외한 모든 도로에서 주차가 허용(자유방임)된다. 하지만 도로 변에 노란색 또는 빨간색 선이 그어져 있는 구역은 주차가 금지된다.
자동차 운행과 관련해 한가지 참고할 만한 것을 덧붙인다. 탑승인원 초과에대한 것인데, 이곳에 사는 어느 한국 사람이 직접 겪은 일화다. 어느 날 승용차에 6명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찰에 탑승인원 초과로 적발됐다고 한다. “잘 몰랐다, 한번 봐달라”고 통사정을 하니 운 좋게도 벌금 딱지는 떼지 않고 봐줬다고 한다. 그런데 초과 인원 1명은 그 자리에서 내리라고 했고,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워둘 수는 없으니 그 사람을 내버려둔 채 계속 차를 주행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 더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 태우면 되겠지, 생각하고 계속 차를 몰았는데 약 10마일(16km) 이상을 그 경찰차가 뒤에 따라붙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