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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꿈꾸는 미국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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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극장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가 상영될 때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아이들보다 더 커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느린 일 처리로 악명 높은 자동차국(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 직원으로
나무늘보가 등장할 때다. 슬로 모션으로 서류에 도장을 찍는가 하면 썰렁한 농담을 듣고 ‘하, 하, 하’
한 땀 한 땀씩 웃는 나무늘보를 보며 관객들은 배꼽을 잡는다.


DMV의 더딘 행정을 직접 경험했던 내게 나무늘보의 캐스팅은 ‘신의 한 수’로 읽혔다. 한국 운전면허를
미국면허로 바꾸는데 통상 두 달이 걸리고 그마저도 제때 내주지 않는 DMV에 디즈니가 통쾌한 한방을
날려 준 기분이라고 할까.


덕분에 주토피아는 그동안 ‘넘사벽’이던 ‘겨울왕국’의 인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미국의 현실을 풍자적
으로 반영하면서도 미국인들이 꿈꾸는 이상향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종(種)’에 상관없이 서로 배
려하며 조화롭게 사는 사회, 그것도 미국이란 하나의 깃발 아래서 말이다.


<영화 주토피아에서 DMV직원으로 나온 나무 늘보가 업무를 보고 있다. >


■멜팅팟보다는 비빔밥에 가까운 미국사회


미국을 흔히 멜팅팟(Melting Pot•용광로)에 비유한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하나의 쇳물로 녹아
흐르는 용광로 같다는 의미다. 정작 미국에서 살아보니, 원재료 자체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용광
로보다는 비빔밥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도 한 그릇에 담긴 재료들이 각자
고유한 색과 맛을 잃지 않는 비빔밥 말이다.


필자가 사는 워싱턴DC 인근에는 세계 각국에서 이런저런 임무를 띠고 파견 나온 사람들이 많이 산다.
초등학교에도 토종 미국인부터 중국, 터키, 아일랜드, 러시아,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다
닌다. 5학년인 큰아들은 여태껏 미국인인 줄 알던 반 친구의 국적이 불가리아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
고 놀라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음력 설을 비롯해 아일랜드의 명절인 패트릭의 날(St.Patrick’s Day) 등 외국의 주요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그 기원과 의미 등을 가르치기도 한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매년 열
리는 ‘인터내셔널 나이트’는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때만큼은 각국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전통
음식과 공연을 마음껏 선보인다. 그 중에서도 한국 엄마들은 열과 성을 다하기로 유명하다. 올해
2월 열린 행사를 앞두고 한국의 학부모 20여 명은 작년 말부터 공연팀, 음식팀, 전시팀을 꾸려 체
계적으로 준비해 왔다.
   
우리 아이들이 꾸민 무대는 태권무. 유치원생부터 6학년까지 스무 명이 넘는 한국 학생들이 K팝에
맞춰 태극1장의 태권무를 선보였다. 강당에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외국 학부모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이다.


<지난 2월 마셜로드 초등학교에서 열린 ‘인터내셔날 나이트’에서 한국 학생들이 태권무 공연을
 하고 있다.>


■디즈니월드에 있는 대통령관……곳곳에 스며든 ‘애국’


필자가 미국에서 자주 접하는 뉴스 가운데 하나가 경찰과 흑인의 마찰이다.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
도한 공권력 집행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뉴스도 종종 나온다. 인종차별의 갈등을 결코 봉합하기 힘
들다는 인상을 갖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인종이 미국이란 하나의 국가에서 어우러져 살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많은 장치가 있겠지만 필자의 짧은 경험에서 내놓을 수 있는 1차적인 해답은
애국심 같다. 미국인들의 ‘나라사랑’ 혹은 이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은 상상 이상이다.  공립학교에
서는 매일 아침 국기에 대해 맹세를 한다. 1년 내내 집 앞에 국기를 걸어놓은 집도 많을 뿐더러 우
리로서는 이젠 낯선 풍경이 된 군인에 대한 특별대우도 눈에 띈다.


대형 테마파크에도 ‘애국심’을 유도하기 위한 시설을 설치해 뒀다. 대표적인 게 플로리다주 디즈니
월드에 있는 대통령관(The Hall of President).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건물을 본 떠 만든 극장
인데, 초대 조지 워싱턴과 현재의 버락 오바마까지 역대 대통령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한 로봇
들을 볼 수 있다.
 


<초대 대통령부터 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현실감 있게 재현한 로봇들이 무대에 세팅돼 있다.>


프로그램은 ‘하나의 미국’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꾸며져있다..
먼저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서 미국의 탄생부터 남북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담은 영
상이 소개되면 링컨 대통령(사실은 로봇)이 무대에 나와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선보인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이라며 연설을 할 때 손
놀림과 표정까지 섬세하게 구현해 실제 대통령을 보는 듯하다. 쇼의 대미는 오바마 대통령의 몫.
역대 대통령들이 한 무대에 나와 한 명씩 인사를 한 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꿈에 관한 연설로
무대를 끝낸다. 20분가량의 쇼가 끝나면 관람객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좀 전까지 놀
이기구를 타며 마구 웃고 떠들고 흥분했던 아이들도 이때만큼은 숙연해진다.


이런 낯선 광경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만약 우리나라 테마
파크에 현직 대통령부터 역대 대통령을 미화하는 상영관이 들어선다면. 아니 그런 계획이 추진된다
면. 이런 단순한 가정만으로도 앞으로 벌어질 논란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을까 하는…..


 
<로봇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꿈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있다.>


■불안한 동거…’트럼프’의 약진


동물들의 천국처럼 보였던 주토피아에서도 사실은 온갖 편견과 차별이 존재했다. 토끼는 초식동물은
경찰이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토끼 최초로 경찰이 됐지만 단순 주차업무만 맡는다. 여우는 잔꾀
많고 교활하다는 편견에 갇혀 결국 사기꾼이 돼서 살아간다.


미국 사회도 속을 들여다보면 마찬가지다.  작은 트리거에도 폭발할 수 있는 갈등이 잠복돼 있다.
특히 미국 사회의 숨겨진 민낯은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약진을 넘어 대세로 굳어진 데서도 드
러난다. “멕시코인은 강간범”, “무슬림 미국 입국 금지”라는 인종차별적인 막말을 쏟아내고도 지지율
1위를 지키는 이유가 뭘까. 그만큼 잠재적 지지층이 많다는 의미가 아닐까?


조지 메이슨대학에서 국제학을 가르치는 한국인 교수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당장 한국으로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년 전 미국 남부를 떠나올 때를 떠올렸다. 유학생 시절, 짐을 싸고
있던 그를 본 이웃집 백인이 한국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었단다. 그래서 미국 동부의 대학에 일자리를
얻어 이사를 하게 됐다고 하자, 그 백인의 표정이 변하더니 “왜 우리(백인을 의미)들의 일자리를 빼
앗느냐?”며 항의했다고 한다. 3년간 친하게 지냈던 이웃집 남자는 교수가 떠날 때까지 끝내 아는 척
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에는 남부를 중심으로 아직도 백인 우월주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특히 미 역사상 최
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연방정부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사건도 종종 벌어
진다. 올해 초 오리건 주에서는 한 무리의 목장 주인들이 총기로 무장한 채 한 달 넘게 국가기관의
건물을 점령하는 일도 벌어졌다. 목장 주인이 연방토지에 불을 지른 혐의로 추가적인 징역형을 받자
이런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한 재미교포는 농장주의 초청으로 그 집을 방문했다가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농장 주인이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을 표적에 붙여놓고 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자신의 얼굴도 표적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등골이 오싹했다고 한다.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도 여전하다. 경찰이 감행하는 불심검문 대상자의 90%는 흑인이다. 경찰이
흑인들을 검문하고, 검문에 응하지 않거나 반항•도주했다는 이유로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사고도 다
반사다.  길거리에서 수시로 불심검문을 당하며 살아간다고 상상해보라.  과연 정상적인 삶이 가능
할 지.


총기 소지 허용도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매일 아침 누가 총에 맞아 숨졌다거나, 아니면
누구를 쐈다거나 하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 텍사스 주의회는 대학 캠퍼스 내에서 자
유롭게 총기를 소유할 수 있도록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때문에 교수들은 행여 학점이라도 잘
못 주면 학생들의 총에 맞을까 두려워 일찌감치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있다고 한다. 일부 주에서는
월마트에서 총기와 실탄을 판매한다. 운전면허만 보여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다. 평생 실물 총조
차 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언제든 총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
다. 결국 층간소음과 같은 사소한 시빗거리라도 생기지 않도록 항상 긴장하며 조심조심 살다가 한국
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미국은 땅덩이가 한국보다 100배나 넓다. 자동차로 여행하다 보면 그 광활함에 할말을 잃게 된다.
인구는 3억명이 넘는다. 50개의 각 주가 개별국가나 다름없다. 그런 미국을 하나의 특색으로 정리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에 비친 미국은 한없이 부러운 나라이면서도, 다양한 인종들이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나라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