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현지에서 중국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소 방문학자로 계시는
경향신문 홍인표 차장님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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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금-1/산시성 역사 기행〉
중국은 1년에 1주일 정도의 황금 연휴가 2번 있다. 하나는 5월1일 노동절 연휴이며 다른 하나는 10월1일 국경절 연휴이다. 국경절은 1949년 10월1일, 중국 대륙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섰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중국 정부는 98년부터 경기 활성화를 위해 7일의 연휴를 주고 있다. 올해 국경절 연휴는 10월1일부터 7일까지였다. 본래 쉬는 날인 토요일(9월29일)과 일요일(30일)까지 일하는 대신 7일까지 쉬도록 했다. 특히 18년만에 추석(중국에서는 중추절이라고 함)과 겹친 18년만의 경사라면서 언론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이번 국경절 연휴 동안 무얼할까 생각하다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사정상 가족없이 혼자 중국에 온 만큼 연휴를 알차게 보내고 견문을 넓히는 데는 여행 만한 것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신문 광고에 실린 여행사 패키지 상품 가운데 베이징(北京)에서 비교적 가깝고 역사적 유물이 많은 산시성(山西省·4박5일) 을 선택했다. 갈 때는 일반 침대 열차(잉워·硬臥)인 반면 올 때는 침대가 아닌 일반석 열차(잉주어·硬座)여서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9월30일 오후 10시33분, 베이징 베이잔(北站·북쪽에 있는 기차역이란 뜻으로 베이징에는 본역과 서부역, 남부역, 북부역 등 4군데 역이 있다)에서 임시 열차(단체 여행객을 위해 임시로 운행하는 열차로 차표에 L자가 붙어 있다)를 타고 산시성 다퉁(大同)으로 떠났다. 여행단 일행은 80여명이었다. 잉워는 3층 짜리 일반 침대 열차다. 열차 승무원이 일일이 다니면서 기차표를 받고 나서 좌석 번호가 적힌 양철 조각을 내주었다. 이를 `환표(換票)’라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승무원은 다시 기차표를 내주면서 양철 조각을 가져갔다. 이러한 불필요한 과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승무원들에게 일감을 준다는 차원에서 마련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다행히 안정감이 있는 1층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타보는 침대 열차(보통 침대 열차를 탄 것은 1990년 10월 창춘, 옌지 등 동북 지방 취재 당시 타본 적이 있을 뿐이다)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층마다 가격은 조금씩 달랐다. 내가 탄 열차도 1층은 65 위안이었지만 2층은 63 위안, 3층은 60 위안이었다. 맞은편 1층에 결혼 6개월째인 신혼 부부(남편은 본인이 33세이며 아내가 자기보다 8살이 어리다고 했지만 아내는 그 말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 보였다)가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애정 사업(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을 벌여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아무래도 불편했던지 남편은 자기 자리인 3층으로 올라간 뒤였다.
10월1일 오전 7시10분, 9시간 만에 베이징에서 250㎞ 떨어진 다퉁에 도착했다. 역 앞에 있는 훙치(紅旗) 반점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한 뒤 16㎞ 떨어진 윈강(雲崗) 석굴로 떠났다. 다퉁은 중국의 대표적인 석탄 산지(석탄 채굴량이 연간 3천3백만t으로 노천 탄광이다)인지라 길거리가 칙칙했다. 버스를 타고 30분만에 도착한 윈강 석굴은 우저우산(武周山)기슭에 동굴(53개)을 뚫어 불상(5만1천여개)을 모셨다. 겉에서 볼 때는 별로였는데 동굴마다 2층으로 불상을 모셨는가 하면 높이 13~20m짜리 대형 불상이 즐비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1500년전 이 곳에 도읍을 잡았던 북위(北魏)가 툰황(敦煌)의 모가오(莫高)굴을 만든 장인들을 모셔와 석굴을 세웠다고 한다. 북위는 나중에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뒤 그 곳에 룽먼(龍門) 석굴을 만들었다. 윈강 석굴, 모가오굴과 룽먼 석굴은 중국의 3대 석불이며 동시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오전 10시40분에 윈강 석굴을 떠나 이날 묵을 곳인 우타이산(五臺山·우리나라 오대산과 이름이 같다)으로 떠났다. 낮 12시40분, 쉬엔쿵쓰(懸空寺)에 잠깐 들렀다. 3층 짜리 절이 문자 그대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건물 밑에 지주 10여개를 받쳐놓기는 했다). 맨 꼭대기인 3층에 가서 밑을 내려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아찔했다.(나중에 돌아와서 신문을 보니까 앞으로는 안전을 고려해 쉬엔쿵쓰 1회 입장객을 80명으로 제한한다는 신화통신 보도가 실렸다)
해발 3000m인 우타이산까지 가는 길은 대관령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굽이굽이 돌아가야 했다. 버스 기사가 어찌나 브레이크를 자주, 그리고 세게 밟았던지 도착하기 직전에는 엔진 과열 냄새가 나서 `이러다가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닌가’하며 여행객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기도 했다. 가는 길마다 농가가 드문드문 보였지만 국경절과 추석을 함께 맞는 명절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거리마다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베이징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였다. 흔한 경축절 환영 간판조차 단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물론 산시성(인구 3천만명, 면적은 한반도보다 조금 적은 16만㎢)은 농업을 위주로 생활하고 있어 형편이 비교적 어려운 곳이기는 하지만 중국 경제의 고민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새삼 절감했다.
오후 6시30분, 우타이산의 룽화(龍華) 빈관(빈관은 호텔을 의미하는 반점보다 아래격인 숙박 시설로 우리의 여관 정도로 보면 된다)에 도착했다. 빈관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10명이 하나의 테이블에 앉게 되는데 일가족이 온 자리에 우연히 앉았다. 부부와 아들 부부, 시누이 등이 온 이들 일가족은 추석을 경축한다면서 고량주를 가져왔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와 30대로 보이는 며느리는 한국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았다. 연신 고량주를 권하면서 한국도 추석을 쇠느냐, 중국의 월병(둥그런 과자에다 팥이나 해물 등 속을 집어넣은 음식)처럼 특정한 음식을 먹느냐, 현재 무슨 일을 하느냐 등을 물었다. 연휴에 관광을 하는 중국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이기도 하지만 우리 여행단은 특히 경제적 형편이 좋아 보였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이들도 포동포동했다. 그래서 그런지 관광버스 안에는 쓰레기를 거의 볼 수 없었고 차에서 내릴 때도 상대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등 남을 배려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중국인들이 얼굴을 모르는 남에게는 무심하게 대하지만 서로 인연이 있으면 특별하게 챙기는 중국 특유의 `관시(關係)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10월2일 오전 7시30분, 우타이산에 올랐다. 중국 불교 4대 명산의 하나인 우타이산(5개의 평평한 산이 하나의 산을 이루어 오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은 불교 유적이 엄청나게 많아 제대로 보려면 2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시간 관계상 대표적인 사찰인 쉬엔퉁쓰(懸通寺)와 타위안쓰(塔院寺) 등을 둘러보았다. 우타이산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아버지인 순치제(順治帝)가 출가했다는 전설(순치제가 병사했다는 것이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사실은 사랑하던 비의 죽음을 비관해 우타이산으로 출가했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있다)이 나돌 정도로 청나라 황실과 인연이 깊다. 실제로 강희제와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가 직접 쓴 어필(御筆)이 많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불교 성지인 우타이산을 보았지만 우리나라 절에서 느끼는 성스럽다거나 신비로운 분위기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건물만 서 있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 종교를 탄압한데다 특히 문화혁명 10년 동안 불교 유물을 상당수 파괴한 때문으로 보인다. 스님이 전혀 없는 사찰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단의 상당수는 불교 신도이거나 불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절을 찾을 때마다 향을 사르고 불공을 드렸다. 관광객들은 개혁 개방 정책 이후 정상적인 종교의 자유는 허용하고 있다며 오히려 종교의 자유가 있느냐고 묻는 필자를 이상하게 보는 듯 했다.
오후 2시, 산시성의 성도인 타이위안(太原)으로 출발했다. 우타이산 갈 때 보다는 편했지만 5시간을 쿠션이 제대로 되지 않은 중국산 버스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후 7시, 타이위안에 도착해 바이린(柏林) 빈관에 여장을 풀었다. 성도라서 그런지 그나마 사람 사는 동네에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장 골목길을 잠깐 둘러 보는데 전기 사정이 어려워서인지 희미한 등불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신기했다.
10월3일, 여행의 사실상 마지막 날이다(4일 오전은 자유 시간을 조금 주고 베이징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오전7시30분 타이위안의 빈관을 떠나 오전 9시, 명나라 시대 옛 성을 그대로 재현한 핑야오(平遙)고성(古城)에 도착했다. 핑야오 고성은 옛날 저잣거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특징이다. 관광객들이 저잣거리를 둘러보면서 칠기 공예 작품이나 신발 등 마음에 드는 물건을 가게에서 사도록 했다.
오후 1시, 청나라 10대 거상(巨商)이었던 차오구이파(喬貴發) 일가의 집을 복원한 차오자(喬家) 대원(大院)에 갔다. 차오 집안은 근검 절약과 끊임없는 업종 전환을 통해 200년 동안 중국의 상업계를 주름잡았다. 집에 걸려 있는 집안의 가훈이 인상적이었다. `첩을 두지 마라’ `기생과 어울리지 마라’ `하인을 함부로 대하지 마라’`도박을 하지 마라’ `친구에게 돈 빌려주지 마라’ `나쁜 습관에 물들지 마라’ 등 6개였다. 엄청난 집안 규모에 놀랐지만 후손들은 어디로 가고(이 집은 물론 국가 소유다) 관광객들만 들끓었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이 집의 대표적인 유물인 구룡 병풍(유리에 아홉마리 용을 그린 것)이 있는 본당에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관광단의 일원인 궈옌(郭燕·인민대학 부속 고중 1학년 학생으로 H.O.T의 열렬한 팬이다)군이 간신히 구경하고 나오길래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있다』고 익살맞게 대답했다.
오후 3시, 찾아간 진쓰(晋祠)는 진나라 첫 제후의 사당으로 지은 지 2000년이 넘은 오랜 사당이면서도 호수가 있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좋은 공원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바로 수세식 화장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중국의 화장실은 중국 인상기에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품목이다. 우타이산에서 타이위안으로 가는 도중 들린 주유소 화장실은 자칫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 정도로 자연산인데다 가파르기 이를데 없었다. 그런 만큼 진쓰의 수세식 화장실은 문명의 위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10월4일 오전 11시44분, 타이위안 역에서 베이징으로 출발했다. 도착 예정 시간은 오후 7시45분. 딱딱한 의자라서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맞은 편에 앉은 일가족 3명과 얘기를 주고 받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가장은 특히 `김희선이 1천만 위안 받고 중국 제품 광고에 출연하고 있다’ `한국의 LG, 삼성 제품이 중국에서 인기가 높다’ `한국 자동차 품질이 좋다’ `한국 축구 잘한다’면서 이방인을 위해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이들 가족이 호의로 사준 라면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미리 준비했던 과일로 허기를 달랬다. 열차마다 보통 식당칸이 있는데 관광객 대부분이 라면이나 과일로 점심 식사를 대신했다. 열차는 허베이성(河北省)의 성도인 스자좡(石家莊)과 바오딩(保丁)에서 각각 10분씩 정차한 뒤 예정시간 보다 10분 빠른 오후 7시35분에 베이징 시잔(西站·서부 역)에 도착했다. 베이징 시잔은 출발했던 베이잔과 달리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4박5일 동안 정들었던 관광객들과는 열차 안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역사 밖에 나와서 인사하는 우리와는 습관이 달랐다. 아닌게 아니라 택시 정류장에서 본 우리 여행단은 단 한가족 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자동차를 가지고 집에서 마중을 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동안 어둡게만 여겨지던 베이징 시가지가 한결 환하게 다가왔다. 이번 여행 기간 도중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여행이 좋다는 주위의 충고가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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