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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할 규칙은 만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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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만 봐주세요” “안됩니다”
최근 어바나-샴페인 학교 근처에 있는 월그린(Walgreen) 이라는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겪은 일이다. 아내와 함께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같은 건물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고 있는데 내 차가 견인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견인차 운전사가 내 차를 자신의 견인차에 묶는 작업을 마치고 막 주차장을 빠져 나가려던 순간 우리가 도착한 것이다.

순간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가려던 견인차를 가로막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주차장 주인인 월그린 측에서 허용된 주자시간을 넘겨 주차한 차가 있으니 견인해 가라는 연락을 받고 왔다는 설명이다. 월그린이 고객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이 주차장에는 손님이라 할 지라도 30분 이상 주차하지 못하며 그 이상 넘길 경우 견인조치 하겠다는 안내표지판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물론 그 사인을 처음부터 못 본 것은 아니었다.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조금 늦게 나오는 바람에 30분내에 밥을 먹지 못하고 45분만에 나온 것이 문제가 됐다. 설마 15분 지났다고 견인까지 할까라는 자체적인 판단이 참으로 안이한 생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번 견인조치 당하면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입는 다는 것을 주변 사람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견인비용과 차량 보관료 등을 포함해 모두 100달러(12만원)가량을 지불해야 하는 경제적 손실은 물론 차량 보관장소까지 가야 하는 육체적 수고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견인조치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운전사를 붙들고 늘어졌다. 영하 15도를 하회하는 강추위에 차를 되찾기 위해 다녀야 할 생각을 하니 암담했기 때문이었다. 운전사 아저씨에게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이미 행정적인 절차를 마친 상태인지라 차를 내려놓을 수 없다고 버티던 운전사는 나의 간절한 설득에 한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견인비용을 현장에서 바로 지불하면 차를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견인비용이야 어차피 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받아들였고 결국 견인비용 75달러를 내고서야 차를 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규정보다 15분 더 주차했다가 거의 10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대가를 치룬 셈이다.나 같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처음 와서 가장 많이 경험하는 당혹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가 교통법규 위반에 따른 범칙금 내는 일이다.
한국사람이 가장 흔히 범하는 실수는 스탑(STOP) 사인 무시와 주차위반. 한국에서는 스탑 사인이 별로 없거니와 스탑 사인이 있더라도 자동차나 사람이 없을 경우 조심스럽게 서행하면 문제될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스탑 사인을 만나면 운전자는 반드시 완전 정차 했다가 다시 출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스탑 사인을 못 보거나 봤더라도 대충 눈치를 보고 천천히 주행하다 스티커를 발급 받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특히 차량 흐름이 거의 없는 심야가 취약 시간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고 주변에 차도 없으니 천천히 지나가면 괜찮을 것으로 판단해 스탑 사인을 무시한 채 그냥 지나 가다가 큰 코를 다친 경우가 많다.

다음으로 한국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교통 실수는 주차와 관련 된 것이다. 주자가 금지된 곳에 주차하거나 정해진 시간을 넘겨 주차하다 범칙금을 내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부주의 하거나 규칙을 경시하다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내에서 속도 위반으로 걸리는 경우도 흔한 사례다. 대개 학교 지역의 속도제한은 20~35마일. 차량도 많지 않고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데다 설마 조금 더 속도를 낸다고 문제될 게 있겠나 싶어 가속페달을 밟다 보면 어느새 경찰차의 추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스탑 사인이나 주차질서를 신기하게 잘 지킨다. 이곳 주민들은 아무리 한적한 시간이고 다른 방향에서 차가 오지 않더라도 스탑 사인 앞에서는 차를 완전히 세운 후 다시 출발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교내에서 규정속도도 잘 지키는 편이다.

선천적으로 규칙을 잘 지키라고 태어난 것도 아닐 텐데 그들이 규정을 잘 지키는 이유는 무얼까.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주위의 미국사람에게 물어봤다. 미국 사람들이 규칙을 잘 지키는 배경은 별게 아니었다. 규정을 지키지 않을 경우 반드시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란다. 그런다면 그런 인식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 이유 또한 단순했다. 규정이나 규칙을 정해놓으면 그런 룰(rule)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도 함께 마련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자위반차량을 적발하기 위해 주차 단속 요원들이 정기적으로 주차장이나 거리를 순찰하는 등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도록 관리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들은 심야시간에도 불법주차 차량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 개인 주차장도 무단으로 주차하는 차량들을 단속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놓고 있다.
교통경찰도 상시적으로 교통위반차량을 감시한다. 정기적으로 순회하도록 되어 있다. 차량 이동이 드문 심야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불법주차하면 거의 적발된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이곳 사람들이 법과 규칙을 잘 지킬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규정이나 법을 위반해 적발될 경우 감수해야 할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1~2달러를 아끼기 위해 동전(Coin)을 적게 넣었다가 시간이 넘기는 바람에 10배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한다거나 규정이 아닌 곳에 주차했다간 견인되어 수십 만원의 견인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특히 세금 문제와 관련해 탈세를 하다 적발되면 다시는 영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벌금이 가혹하다.

한마디로 ‘걸리면 죽는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우’를 범하는 사람이 적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설명이다.이들의 의식 속에는 “규정위반=손해”이라는 등식이 머리 속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법과 규정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사회가 법과 규정 룰에 의해 운영된다. 교육 현장인 대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교수들은 학기가 시작하면 미리 만들어 놓은 강의 계획서를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강의계획서엔 강의 진도는 물론이고 강의 운영방침, 성적평가 방식 등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인상적인 것은 교수들의 강의가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물론 강의 방침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강의가 계획서와 방침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드물다. 학생들에게 강의 계획서를 배포하는 교수도 드물었고 설사 강의계획서를 미리 나눠줬지만 그 계획서대로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도 많지 않았던 국내에서의 학창 시절과 비교해보면 신기할 정도다.

“지키지 못할 규정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났다” 한 미국친구의 이 말은 미국인들의 법과 규정에 대한 인식을 대변하는 표현인 듯 싶다.
각종 법규와 규정들이 살아서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이미 만들어진 규정과 법은 반드시 지킨다는 미국인들의 의식이 복잡하고 거대한 미국사회를 건강하고 질서있게 지탱하고 있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규정과 법은 어느 나라 못 지 않게 잘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규정 따로 현실 따로’ 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주차규정 위반으로 거의 10만원에 육박하는 거금을 날렸지만 억울하다거나 화가 나지 않는 것은 남들도 다 지키는 규정을 어겼으니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