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집에 ‘Newton’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영문판이어서 대충 그림만 보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눈을 뗄 수 없는 사진 하나를 보았다. 논에서 일을 하는 농부 주위에 엄지손가락 모양의 산봉우리 여러 개가 땅에서 솟구친 듯 삐죽삐죽 서 있었고, 그런 봉우리가 주변의 논과 굽이치는 강물에 반사된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였다. 그 전까지 미술 시간에 옛 사람들이 그린 산수화를 보면서 ‘왜 산을 이렇게 그리지? 이런 산이 세상에 어디있어?’라는 의문을 품었던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 ‘아, 상상화가 아니구나! 실제로 있는 풍경이구나!’
그곳이 바로 중국의 구이린(桂林)이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도 되지 않은 때라 ‘북경(北京)’이나 ‘모택동(毛澤東)’처럼 중국의 인명, 지명을 중국어 발음이 아닌 한자 발음 그대로 읽었다. 영어 잡지에 ‘Guilin’이라고만 쓰여 있었기 때문에 ‘구이린’은 내가 최초로 중국어 발음 그대로 알게 된 중국 지명이었다. 사진 속 구이린의 절경(絶景)을 보면서 언제가 중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상하이에서 연수를 하면서 드디어 구이린의 실제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 구이린은 중국 대륙의 서남쪽,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는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동북부에 위치한다. 상하이로부터 구이린까지는 1600여km. 난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기차 침대칸을 이용해 구이린에 가기로 했다. 기차 일정을 확인하니 가장 빨리 가는 노선이 20시간이 걸렸다.
기차는 중국 사람들이 가장 흔히 이용하는 장거리 교통 수단이다. ‘중국판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 춘지에(春節)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어느 도시의 기차역은 평소에도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중국엔 정말 사람이 정말 많구나’란 걸 느끼고 싶으면 기차역을 한 번 가보면 된다.
‘허시에하오(和諧號)’라고 부르는 중국 고속철도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중국 기차는 보통 4종류의 좌석이 있다. 부드러운 침대칸인 ‘롼워(軟臥)’, 딱딱한 침대칸인 ‘잉워(硬臥)’, 부드러운 의자석 ‘롼줘(軟座)’, 딱딱한 의자석 ‘잉줘(硬座)’로 나뉜다. 당연히 롼워가 가장 편안하고, 가격도 가장 비싸다. 롼워와 잉워의 가장 큰 차이는 승객이 점유하는 공간의 크기이다. 각각의 침대칸에 롼워는 4개, 잉워는 6개의 침대가 있다. 롼워는 2층 침대 두 쌍이 마주보는 형식이고, 잉워는 상중하로 구분되는 3층 침대 두 쌍이 마주보고 있다. 롼워나 잉워나 1층 침대가 가장 비싸다. 잉워의 가장 아래 침대에는 사람이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중(中) 상(上) 침대는 공간이 넉넉지 않아 그저 누워있을 수밖에 없을 정도이다. 롼워는 위아래 침대 모두 공간이 넉넉하다.
난 롼워를 타고 구이린으로 출발했다. 중국 기차 여행의 매력은 낯선 현지인들과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일행이 여러 명인 경우에는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침대칸을 통째로 전세낸 듯 먹고 마시고 노는 흥겨운 파티가 벌어진다. 내가 본 어떤 일행은 처음부터 바리바리 싸들고 온 안주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남자 4명이 일행인 한 침대칸은 시종일관 카드게임이었다.
내가 탄 침대칸에는 구이린에 사는 13개월 된 아이를 둔 젊은 엄마와 20대 후반의 청년, 30대로 보이는 여성 등 4명이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하게 있다가 젊은 아기 엄마가 너무 열정적(?)으로 말을 거는 바람에 장거리 여행의 말동무가 되었다.
대도시인 상하이와 달리 순박한 구이린 사람들은 낯선 한국 여행객에게 꽤나 친절했고, 가족처럼 스스럼 없이 대했다. 구이린 관광지에서 바가지를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기 엄마는 꺼리낌 없이 아기를 나에게 맡기고 자리를 비우거나, 내가 보던 말던 태연하게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도 했다. 이들은 20시간이 넘는 장도 끝에 종착역인 구이린베이잔(桂林北驛)에 도착하자 불법 사설 택시인 ‘헤이처(黑車)’ 기사와 흥정을 벌이더니 나를 구이린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해 주었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구이린에서 남쪽으로 60여km 떨어진 양숴(陽朔)였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구이린의 산수는 천하제일이고, 양숴의 풍경이 구이린에서 최고다.(桂林山水甲天下 陽朔風光甲桂林)’ 양숴의 경치가 그야말로 ‘갑 중의 갑’이라는 것이다.
약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양숴행 버스에 올랐다. 구이린 도심부터 언듯언듯 기암(奇巖)과 돌기처럼 솟구친 봉우리가 보이더니 교외로 나가자마자 옛 산수화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구이린 일대는 3억6000만년 전 바다 밑 3000~4000m에 있다가 2억2000만년 전쯤 석회암과 백운석으로 된 지층이 융기해 육지가 됐다고 한다. 이후 오랜 세월 석회암이 물과 비바람에 씻겨 침식되면서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
1시간30분 만에 도착한 양숴 버스터미널. 우리나라 시골 버스터미널과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고개를 들어 좌우를 둘러보니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자욱한 물안개 사이로 보이는 포물선 모양의 봉우리들이 옛 산수화의 모습 그대로였다.
양숴 ‘십리화랑’ 길에서 디지털카메라의 파노라마 기능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다.
양숴에 머무르는 동안 구이린 여행의 ‘백미’라는 리장(漓江)에서 배도 타고, 자전거를 빌려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어딜 가든 ‘절경(絶景)’이라는 수식어가 손색이 없을 정도였고, 차도 잘 안 다니는 한적한 시골길에서는 풍경에 취해 현실감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양숴 근처 위에량샨(月亮山)으로 가는 길은 ‘그림 같은 10리길’이라고 해 십리화랑(十里畵廊)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구이린 일대는 1970년대 초부터 이미 해외 여행객들을 받기 시작했고, 중국 내에서 가장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다. 양숴의 다운타운이라 할 수 있는 시제(西街)는 밤새도록 클럽과 바(bar)가 붐비고, 전세계의 음식이 모두 모여있는 것은 물론, 중국에서 가장 영어가 잘 통하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름다운 자연풍경에 눈이 호강을 하지만, 어딜가든 귀찮은 호객꾼들과 맞딱뜨려야 한다. 리장의 명물인 ‘물고기 잡는 새’ 가마우지는 줄에 묶여 온종일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느라(물론 돈을 내야한다) 고기 잡는 법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1992년 겨울, 고등학생이던 나는 친구들과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 한 친구의 친척분 소개로 우리가 머물던 곳은 눈이 시리도록 멋진 바다 풍경에도 어찌나 사람이 없는지 한적하다 못해 기괴할 정도였다. 라면 살 곳이 없어 기차가 잘 다니지 않는 철로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해안 보초를 서는 군인 아저씨에게 ‘위험하다’는 경고를 듣던 그곳이 바로 ‘정동진’이었다. 2년 뒤 드라마 ‘모래시계’의 인기와 함께 정동진은 관광객이 들끓기 시작했고, 몇 년 후에 다시 가본 정동진은 그저 부산하고 흔한 관광지가 돼 있었다.
아마도 예전에 구이린과 양숴를 다녀온 사람들은 지금의 번잡한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모르겠다. 차가 다니고,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하나둘씩 호텔과 음식점, 조악한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들어서고 있었다. 양숴를 떠나면서 예전에 봤던 정동진의 변화가 생각났다. 옛 선조들이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 위에 유치찬란한 광고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인 것 같은 천박한 관광지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