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미국 연수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아이들의 영어 학습이었다. 그런 반면 가장 큰 걱정 역시
어린 아이들의 언어 문제였다. 연수를 준비하던 때에 누군가 말했다. “아이들은 3개월이면 적응해.”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지만, 또 한국에서 겨우 알파벳만 떼고 왔음에도 부모 입장에서는 은근한
기대가 안 생길 수 없었다.
7월 20일경 정착해 3개월이 흐른 뒤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ESL 선생님을
따로 붙여 지원했지만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과 ESL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두툼한 숙제
를 할라치면 초등학교 2학년 아들과 한살 어린 딸은 까막눈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숙제를 놓고
가르치고 배우느라 온 가족이 씨름을 하면 하루가 가기 일쑤였다. 영어가 능숙한 교포 자녀들과도 의
사소통이 어려웠으니 교실에서의 모습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학교 교육을 따라갈 수 있느냐도 문
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다.
그 무렵 학교 생활에 대해 묻자, 아들은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학교에서 하루 1시간
정도는 아이들끼리 놀게 되는데 술래잡기를 해도 껴주지 않더라고 했다. 몇몇이 재밌는 놀잇감을 갖
고 있어 가보니 “Don’t see!”라며 등을 돌리더라는 말을 들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에 대한 이질감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큰 장벽이었던 것이다. 한마디 소통이 안되는 곳에
서 이렇게 매일 6시간을 버티는 아이들에게 미안함이 커졌다. 급기야 아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나
혼자서라도 비행기 타고 한국 가면 안돼?”라고 묻곤 했다.
‘3개월만 버티라’는 조언이 무색해졌지만 스스로 위안을 만들어내고도 싶었다.
‘도착 후 3개월이 아니라, 입학부터 3개월을 말하는 게 아닐까?’
다시 기대를 부여잡고 아이들을 격려하며 버티기에 돌입했다. 물론 생활은 이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
았다. 아이들이 ‘학교 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일 뿐 이었고, 매일매일의 숙제는
버거웠으며, 영어 배우기는 커녕 성격만 삐뚫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차올랐다.
그렇게 입학한 지 3개월도 지나고 한 학기가 마감되는 12월 20일경, 아이들의 친구들이 처음으로 우
리 집에 놀러왔다. 각 부모의 허락을 받아 집으로 찾아가 노는 ‘play date’. 아이들은 같이 쿠키를
만들어 먹고,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본다. 저희들끼리 웃고 떠든다. 친구들이 돌아간 뒤 잠을 재우며
아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소피아는 뭘 좋아했어?”, “매튜는 뭐를 잘해?” 아들은 별 걸 다 묻는다
는 듯이 답하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에 내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짧은 겨울 방학 후 새로운 학기가 시작돼 이곳에서의 시즌 2를 맞고 있다. 아들은 이제 수학과 함께
독서와 작문 숙제는 혼자 한 뒤에 문제가 없나 확인만 받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을 집에서 전하는 일이 늘었고, 자기가 아는 표현이면 영어로 소통하려는 시도가 빈번해졌다.
딸 역시 문장을 읽는 실력이 향상됐으며 현지 아이들과의 어울림도 자연스러워졌다. 특히 발음은 두
아이 모두 확실히 나아졌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이제 진척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모두의 공통된 견해처럼,
적응됐다 싶으면 이곳을 떠나겠지만. 또 가까스로 습득한 언어가 돌아간 뒤에는 빛의 속도로 잊혀지
겠지만.
반년의 경험 그리고 주변의 조언과 전언을 종합해 단기 체류자의 자녀를 위한 언어 교육 팁을 정리해
보았다.
– 적극적이고 쾌활한 성격일수록 언어 습득 속도가 월등히 높다. 그러한 성격을 지닐 수 있도록 가정
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 선생님과의 관계보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재미있는 물품을 지니게 해서라도 아이가 소외
되지 않도록 하고, 자녀와 친구들 사이 관계를 위해 부모가 적절히 개입할 수도 있다.
– 교실에서 자녀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충분히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부모가 학교내 봉사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선생님들께 틈틈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면 이곳에서의 단기 체류 결정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언어 습득도 더디고,
교우 관계도 원만하지 않을 수 있다.
– 저학년이나 미취학 아이의 경우도, 도착 전에 영어에 충분하게 노출시키고 교육을 받고 오기를 적
극 권장한다.
– 영어 습득에 급급해 오로지 영어만 주입하려 한다면 거부감이 클 수 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한국 책이나 애니메이션도 적절히 보여준다.
– 무엇보다, 자녀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자녀에게 확인시켜 자신감을 안겨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