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1년간 머문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은 국내에 그리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인근에 듀크와 UNC라는 양질의 대학이 있고, 자연 환경도 좋고, 물가도 대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싸 많은 연수자들이 찾는 곳이다. 혹 노스캐롤라이나를 연수지로 삼으려는 분들을
위해 이 곳 명소들을 소개할까 한다.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려면 역시
영화만한 도구가 없을 것이다.
1. Bull Durham/더램ㆍ채플힐
미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팀인 더램 불스가 소재다. 천방지축의 에이스 투수(팀 로빈스), 베테랑
이지만 한물 간 포수(케빈 코스트너), 시즌 마다 선수를 바꿔가며 애인으로 삼는 경기 기록원
(수전 서랜든)이 주인공이다. 2류 인생의 꿈과 좌절을 세련된 미국식 유머와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지는 영화다. 1988년에 개봉됐으니 좀 철지난 듯한 느낌은 있다. 하지만 이 곳에 와서
다시 본 이 영화의 느낌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영화 속 아구팀이 소속된 캐롤라이나 리그
투어를 따라가며 더램 뿐 아니라 인근 그린스보로, 파옛빌, 윈스턴 살렘 등의 옛 모습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더램 불스가 상징하듯 이 곳은 담배 농사와 목재 산업이 주업인 별볼일 없는 시골 동내였다.
이를 변화시킨 게 이른바 동부의 실리콘밸리라는‘트라이앵글 리서치 파크’다. 연수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채플힐에서 더램은 30분 거리, 주도인 랄리는 1시간 내다. 리서치 파크는 이 세 개의
도시 사이에 들어서 있다. 이를 배경으로 캐리, 에이팩스 등 ‘신도시’들이 계속 들어서면서
사실상 광역 도시로 엮이고 있다. 세종시를 한때 과학비지니스 타운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진행될
때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곳 교민들 중 상당수는 북부 대도시 인근에 살다 값 싼 거주비, 교육환경을 찾아 남하한 사람
들이다. 우리가 보기엔 여전히 한적한 대학 도시이지만 그들 말로는 과장 좀 보태 천지개벽 수준
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활발한 외부인의 유입, 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힘입어 남부치고는 상당
히 개방적이다. 지난 대선 기간에도 공화-민주 양당이 팽팽한 접전을 벌인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로 분류되기도 했다.
2. Nights in Rodanthe(2008)/아우터 뱅크스
아우터 뱅크스는 노스캐롤라이나 동쪽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긴 띠모양의 모래둑이다. 그 길이만
320km.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신 랄리가 주도한 영국의 식민지 원정대가 1584년 처음 닻을
내린 곳이다. 1903년에는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가 하늘을 나는 꿈을 실현시킨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채플힐에서는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있다.
이 곳의 바다는 한마디로 격렬하다. 파도가 높고 늘 거친 모래바람이 인다. 괜히 라이트 형제가
시카고에서 이곳까지 온 게 아니다. 이런 격렬함이 일반적인 비치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
기를 연출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힐링’의 기능이 있달까.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료사고로 소송을 당한 랄리의 의사(리처드 기어)는 피해자와 합의를
위해 아우터뱅크스의 작은 어촌마을 로단스를 찾는다. 이 곳에서 그가 마주친 여인은 이혼 위기에
처해 친구의 여인숙을 잠시 맡아주고 있던 중년의 여성(다이안 레인). 평온한 듯 보였던 이들이
삶에 닥친 위기는 불시에 아우터 뱅크스를 덮친 폭풍만큼이나 압도적이고, 도대체 극복할 방법이
없을 듯 보인다. 하지만 폭풍은 언제가는 그치고 구름은 걷히는 법. 위기의 순간을 함께 넘어선
두 사람은 서로를 보듬고, 치유 받는다.
3.The Notebook/찰스턴
‘나이트 인 로단스’의 원작자인 니콜라스 스파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스파크는
이 곳 해안가인 뉴베른 지역에 살고 있다.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최루성의 사랑 얘기.
하지만 영화의 배경인 찰스턴을 이만큼 아름답게 묘사한 영화도 드물다.
찰스턴은 미국의 여느 도시와는 그 분위기가 색다르다. 해안을 향해 늘어서 있는 독특한 형식의
저택들과 식민 시절의 호사스러움이 여전히 묻어나오는 플랜테이션. 쇠락해가는 것의 비장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을 때 찰스턴을 찾곤 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젊었을 때 한창 잘 나가던
미녀가 곱게 늙은 느낌이랄까. 더할 것도 덜 것도 없이 고스란히 세월의 더깨를 쌓여가고 있는
곳이다.
이웃 주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도시지만 채플힐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거리. 이 곳의 교통 여건으로
보면 주말 여행이 가능한 곳이다. 푸짐한 남부 식단과 서던 호스피탈리티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