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에 총격범이 나타났다! – ‘락다운’ 체험기

Alert from Duke energy

잠에서 깨어보니 문자 메시지 여러 통이 와있다. 간밤에 우르릉 쾅쾅 비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우리 집 포함2000여 세대가 정전 됐다는 전력 회사의 메시지였다. 충전이 되지 않은 휴대전화를 뽑아 몸을 일으킨 뒤 시리얼로 간단히 아침을 때웠다. 오늘은 저널리즘스쿨 첫 미팅이 있는 날이다. 차고 문이 안 열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곧 전력이 복구됐다.

캠퍼스는 개강 전과 달리 활기가 넘쳤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하늘처럼 파란 학교 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도로마다 푸른 물결을 이뤘다. 캠퍼스 내 호텔에 도착한 건 12시 무렵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동료 연수생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 했다. 막 일어나려던 1시쯤,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Alert from UNC

!Alert Carolina!로 시작하는 생전 처음 보는 재난 문자가 도착했다. “무장한 위험 인물이 캠퍼스 내에 혹은 가까이 있습니다. 즉시 실내로 들어가시오. 창문을 피할 것” 독해는 되는데, 이해는 안 된다. 이게 무슨 일이지?

대학 측으로부터 수신한 긴급 메시지. 주로 허리케인 등 자연 재난을 알리는 용도라고 한다.

호텔 직원들이 분주해졌다. 우리 일행 10여명을 창문 없는 공간으로 신속하고 질서 있게 안내했다. 리셉션홀로 보이는 창문 없는 방엔 호텔 내 다른 곳에 머물던 사람들 여럿이 이미 피신해있었다. 지도교수는 본인도 처음 겪는 일이라고 하는데, 방에 모인 사람에게선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 것마냥.

UNC 캠퍼스 전체가 ‘락다운‘ 됐다. 창문 없는 방을 지키는 건 비무장 상태의 호텔 직원 서너 명 뿐이다. 무장한 위험 인물이 들이닥치면 창문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연수 주제가 재난보도 저널리즘인데, 마침 미국 사례로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연구하고 있었다. 사이코패스 성향의 두 학생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아무 이유 없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비극적인 범행이었다. (학교 총격 사건의 대명사격인 이 사건에서 경찰과 주정부, 언론은 여러 문제를 노출했다. 대표적인 게 경찰의 건물 진입이 늦어 희생자가 늘었다는 비판이었는데, 이후 경찰의 대응 매뉴얼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불안감이 엄습할 무렵 호텔 직원들이 물병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한 중년 여성이 호텔 직원에게 농담을 건넸다. “그러지 말고 초코칩 쿠키도 좀 내오지 그래” 10분쯤 뒤 진짜 초코칩 쿠키가 들어왔다. 30분쯤 뒤엔 신선한 과일과 치즈, 스낵이 ‘대피소‘에 차려졌다. 냉방병에 대비한 모포도 지급됐다. ‘아. 여기 호텔이었지…’

호텔에서 ‘대피소’에 제공한 ‘구호품’의 수준. 블루치즈에 찍어먹은 샐러리가 별미였다. 강의실이 아닌 호텔에서 락다운을 맞아서 참 다행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한국인 대학원생들 카톡방에선 이미 사건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 화학 연구동에서 연구원이 본인의 지도교수를 쐈다는 것이다. 둘 다 동양계라고 한다. 언론보다 속보가 빠르다. 구글맵을 켜보니 화학 연구동은 여기서 불과 0.4마일 떨어진 곳이다.

재난문자는 2시 25분, 3시 15분, 3시 45분, 세 차례 더 왔다. 대피 장소에 그대로 머물라는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모든 강의와 교내 활동은 취소됐다. abc 로컬뉴스 중계 화면을 보니 학교 내엔 경찰차가 쫙 깔렸고, 도로는 폐쇄됐다. 채플힐 지역에선 초등학교도 아이들을 하교를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곳에 사는 동료 연수생들은 자녀들 걱정이 늘었다. 언론들은 대학에서 발표한 불충분한 내용(무장한 위험 인물이 캠퍼스에 있다는)만 반복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아니 여태 안 붙잡고 뭣들 하는 거야?’

지역 방송사의 생중계를 통해 바깥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왼쪽의 사진이 총격범이다. 사건 초기 ‘이 사람을 보면 신고해달라’며 경찰이 배포한 사진인데, 바꿔 말하면 총격범이 잡히지 않은 채 상당 시간 활보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얼마 전 등록한 아이의 YMCA 캠프 안내문이 떠올랐다. <가져올 것 – 점심, 스낵 2개, 선크림 등 / 가져오지 말 것 – 사탕, 게임기, 무기> 블랙 코미디라고 생각했다. 초등학생이 총칼이 어디 있다고. 웃기려는 의도였다면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되고 돌아보니, 진지하게 쓴 걸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진짜 미국에 살고 있구나.

방학 캠프에 ‘웨폰’을 가져와선 안 돼! 미국에서였다면 ‘더 글로리’ 연진이는 아마 총으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All Clear

‘올 클리어‘가 뜬 건 4시 15분. 3시간만에 락다운이 해제됐다. 한국인 대학원생들의 카톡방 정보력은 대단했다. 서른 네 살 우한대학교 출신의 중국인 대학원생이 본인의 지도교수를 쏜 것으로 드러났다. 총격은 1시에 벌어졌고, 피의자는 무려 1시간 30분이 지나 1마일 떨어진 곳에서 붙잡혔다고 한다. 우리가 있던 호텔까지 충분히 올 수도 있었겠구나. 범행 동기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총격범이 90분이나 활보하고 돌아다니는 동안 경찰은 뭐했는지, 비판하는 보도는 2주가 지난 시점까지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도했을까.

3시간 남짓 대피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땅바닥이 촉촉했다. 또 한바탕 소나기가 온 모양이다. 아침 10시에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 내려준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많이 기다렸지? 우리 오늘 H마트 가기로 했잖아.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저녁 6시쯤 대학 총장과 경찰 책임자가 함께 사건 브리핑에 나섰다. 이 브리핑을 하는 곳이 우리가 대피했던 ‘캐롤라이나 인’이라는 호텔이다. 대학 측은 이후 학교 구성원들의 트라우마 등을 우려해 정신 상담 프로그램을 확대했으며, 학생들은 정부와 의회를 향해 총기 규제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에필로그

정확히 16일 뒤, 티샷을 마친 연수생들의 휴대폰에 또 다시 Alert Carolina가 울렸다. 내용도 복사해서 붙인 듯 똑같았다. 민방위 훈련 같은 건가? 하지만 이번에도 실제 상황이었다. 총기를 소지한 교직원이 학생회관 건물에서 위협적인 행동을 했지만, 다행히 이번엔 실제 총격으로까진 이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물론 지역 사회는 짧은 기간 반복된 위협적인 상황에 불안감을 느꼈고, 주변 다른 학교에서도 총기 규제 촉구 집회가 이어졌다. 단신 수준이었던 집회 보도는 정치권 반응까지 묶어 심도 있게 다뤄졌다. 3년전 이 지역 고교 총격 사건의 생존자이기도 한 대학 신입생은 언론 인터뷰에서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절절하게 호소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진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