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휴지 세일하나봐!” 코스트코에 들어가던 와이프의 말이었습니다. 세일 품목을 감지하는 촉이 발동한 것이지요. 연수 생활 내내 달러가 궁하니 마트에 들어갈 때마다 촉은 더 민감해진 상황. 마트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진짜 휴지 세일의 날인 것 같았습니다. 대형 카트가 지나갈 때마다 하나 걸러 하나씩 휴지가 실려 있었습니다. ‘휴지 산다고 주차장도 그렇게 막혔던 거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비교적 한산했던 평일 점심시간이었는데, 그날따라 코스트코 주차장이 너무 많은 카트로 막혔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빨리 휴지 담으러 가자!
카트를 끌고 들어가자마자, 곧장 휴지 코너로 직행했습니다. 다른 물건에 눈길을 줄 새가 없었습니다. 미국 코스트코 몇 번 와봤다고, 카트는 달러 절약을 위해 휴지가 쌓인 곳으로 최단거리를 질주했습니다. 언젠간 쓸 테니, 사는 게 남는 겁니다. 그런데 휴지가… 수북이 쌓여 있어야 할 코스트코 휴지가 없었습니다. 휴지 코너는 넓직한 공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창고형 매장답게 그 공터는 더욱 휑하게 보였습니다. 아이고, 한발 늦었습니다. 휴지 코너 좌우로 키친타월 재고는 넉넉해 보였습니다. 앞으로 집에서 휴지 쓸 때마다 오늘의 품절대란이 생각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휴지 가격. 휴지 30롤이 들어 있는 제품은 19.99달러. 세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 가격 그대로였던 겁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휴지를 사가던 미국인들은 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매장을 둘러보니 생수 코너 또한 품절대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당 생수를 5개까지 살 수 있다는 안내 문구만 걸려 있습니다. 코스트코에서 그야말로 뜬금없이 동이 나버린 휴지와 물. 다음날 들른 월마트에서도 생수 코너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혹시 나만 모르는 재앙이 닥쳐오고 있는 걸까? 정보 소외가 불안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저마다 휴지와 생수를 가득 담아 구입하는 모습. 군중이 대거 몰려 마구잡이로 생필품을 쓸어 담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분명 조용하고 차분한 사재기였습니다. 사재기는 미국에 코로나가 막 확산할 때인 2020년 초 이후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코로나 초기, 외출이 금지된 지역을 중심으로 생필품을 비축해두려는 움직임이 사재기로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도 휴지와 물, 통조림 등의 품절이 이어졌습니다. 4년 만에 나타난 사재기. 그때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분명 평일 낮 한산해야 할 마트에서 보기 힘든 한 장면입니다.
허리케인이 또 올라온다?
집에 온 뒤에야 의문이 일부 해소됐습니다. 최근 노스캐롤라이나 서부를 휩쓸고 간 허리케인 헬렌에 이어 또 하나의 ‘큰 녀석’이 북상하고 있다고 알려진 것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 오픈 채팅방에도 해당 내용이 공유됐습니다. 허리케인에 사망자가 속출하고, 수백 명이 실종되고, 도로에 이어 물과 전기도 끊긴 상황에서 또 허리케인이 북상한다니. 늦었지만 이제라도 다시 휴지 사냥을 나가야 하나 싶어 미국 국립허리케인센터에 접속했습니다. 허리케인은 한국에서야 남 일이지만, 여기서는 나와 가족의 일이 됐기 때문입니다.
조용한 사재기가 진행되던 와중, 새로 북상하는 허리케인은 어디쯤 있었을까요? 사실 허리케인은 없었습니다. 국립허리케인센터에 따르면 10월 1일 현재 북대서양 한복판에는 허리케인으로 발달하기 전 단계인 열대성 폭풍 하나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저 멀리… 대략 4,000k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TV도 신문도 새로운 허리케인에 관해 별다른 언급을 한 바 없습니다. ‘Kirk’라는 이름이 붙은 열대성 폭풍은 그 뒤 허리케인으로 발달하지 않고 해상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한마디로 아무 일 없이 사재기가 벌어진 것입니다.
미국인을 마트로 몰리게 한 것
‘코스트코에 휴지 동났다더라’, ‘뭔가 위험하니까 저러는 거겠지’. 이렇게 실체 없이 퍼지는 전언이 사실 사람들 심리에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내일 가도 되는 마트를 오늘 가게 만듭니다. 안 사도 되는 휴지와 물을 카트에 담도록 합니다. 유난히 큰 피해를 남긴 허리케인 헬렌, 아직 끝나지 않은 허리케인 시즌, 재난 대응은 늘 과하다 싶게 해야 한다는 격언, 또 일부 미국인들의 재난 감수성이 그들을 조용히 마트로 몰리게 한 것 같습니다. 이번 주 생필품 세일 정보와 무관하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