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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에서 운전면허 따기 – ‘긴 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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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수기하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게 바로 운전면허 취득입니다. 땅덩이가 넓으니 어디 가려면
차가 필요하고 운전면허도 당연히 필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연수생들이 운전면허에 목을 매는
건 단순히 운전하는데 필요해서만은 아닙니다. 운전이야 급한대로 국제운전면허증을 사용해도 되지만
미국 내에서 당장 쓸 신분증이 없기 때문입니다. 관공서는 물론 도서관 회원가입을 하거나 국립공원
패스를 하나 살 때도 PHOTO ID를 요구하는데 이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제가 있는 텍사스의 경우 약간의 구비서류와 함께 한국운전면허증을 제출하면 미국운전면허증으로
교환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생활에 빨리 적응도 하고 미국 법규와 문화를 체험해 보자는 생
각에 직접 응시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미국은 주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제가 경험한 것이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 미국 운전의 모든 것


필기시험 교재로는 를 택했습니다. 통상 한인 사이트에 족보가 올라와
있고 또 대충 상식으로 봐도 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혹시나 떨어지면 망신이기도 하려니와 솔직히
미국 교통체계에 대해 아는 바도 없어 미국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책을 읽었습니다.(참고로 운전면허
응시서류의 경우 인터넷에서 내려 받을 수 있으니 혹시 시험을 보실 계획이시라면 미리 작성해 가시는
게 편리합니다.)


Driver Handbook은 각 주의 Department of Public Safety(또는 Department of Motor vehicles)가 운
전자와 면허응시자들을 위해 제작한 것으로 홈페이지에서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면허시험
장 앞에서 파는 기출문제 위주의 면허시험용 책자가 아니다 보니 분량이 80페이지가 넘습니다. 하지
만 면허의 종류와 법규 위반 시 처벌 수위 같은 행정적인 사항에서부터 도로 주행 우선순위, 경찰에
단속됐을 때 행동수칙 같은 내용까지 망라돼 있어 도로 환경이 낯선 저에게는 시험 통과 뿐 아니라
실제 운전에도 상당한 도움이 됐습니다.


▣ 인터넷 • 무인 단말기로 ‘줄 서기’


줄 서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데다 도착 시간도 조금 늦었던
만큼 무작정 기다릴 각오를 하고 면허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긴 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
신 무인 단말기가 보이더군요. 제가 볼 업무종류와 휴대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렸습니
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 번 창구로 오라는 안내방송과 함께 게시판 안내문구가 떴습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휴대전화번호를 입력해두면 굳이 면허시험장에 가지 않고도 ‘줄’
을 설 수 있습니다. 자기 차례까지 예상시간을 문자로 알려줄 뿐 아니라 설사 차가 막혀 자기 차례를
놓쳤더라도 지금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면 다시 대기자 명단 앞부분으로 이름이 올라갑니다.)


창구에 가 서류와 응시료를 내고 사진을 찍은 뒤 스크린 터치식 단말기로 이동해 필기시험을 봤습니
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던 기출문제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훨씬 구체적인 문제가 많더군요. 텍사스의
경우 70% 이상 정답을 맞춰야 하는데 문제를 다 풀고 나니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도통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제 서류를 접수했던 담당자에게 찾아가니 잠시
만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긴장됐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담당자가 환한 얼굴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 <브레이크등>의 배신


담당자는 오늘 바로 실기시험을 보겠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보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꼭 붙을
거예요. 행운을 빌어요.”라는 직원의 말에 용기 백배, 시험시간을 예약한 뒤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
습니다. 시간에 맞춰 차를 몰고 시험장으로 나가자 시험 감독관이 보였습니다. 응시서류와 차량보험
증을 확인한 뒤 차량 앞뒤에 있는 방향지시등을 점검했습니다.(미국에서는 면허시험을 자기 차로 보
기 때문에 실기시험 전 차량의 상태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경적을 울려 보라고 해 시원하게 ‘빵’ 소리을 날린 뒤 브레이크등을 확인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
겼습니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후미등이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담당자는 안타까운 듯 브레
이크를 좀 밟아보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힘껏 밟아도 등은 켜지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탈락… 화가
날 법도 한데 헛웃음만 나왔습니다. 저 역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차량 점검을 안 한 게 아니었습니
다. 하지만 브레이크등은 밟을 때만 불이 들어오는 특성상 누군가 도움 없이는 확인해볼 길이 없어
‘당연히 들어오겠지’ 하고 그냥 넘긴 게 화근이었습니다.


감독관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제게 다음 시험은 예약할 필요 없이 다음 날 아침 7시 30분까지 오면 된
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차를 고칠 길이 없어 며칠 뒤 다른 차를 몰고 시험장을 찾았습니다. 아
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와야 했기 때문에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예약하지 않고 와도 된다고 해서 그냥 왔다고 말하고 창구에 서류를 내밀었습니다. 담당자가 컴퓨터
로 뭔가를 조회하더니 오늘은 예약이 꽉 차 빈 시간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미안하게 됐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예약을 하라고 했습니다. “예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온 건 데 이건 뭐지….” 싶었습니다.(알고 보니 하필 그 때가 방학 기간 미국 고등학
생들이 면허시험 보려고 대거 몰리는 시기여서 그랬다고 합니다.)


받아온 예약 사이트 주소에 접속했습니다. 한참 뒤에나 예약이 가능했습니다. 가족여행 스케줄과 정
확히 겹쳤습니다. 아내는 그냥 한국면허증으로 바꾸자고 했습니다. 오기가 치솟는 게 그렇게는 못하
겠더군요. 지금까지 해놓은 게 아깝기도 하고…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동네 병원과 미장원도 예
약 없이는 못 간다는 미국에서 관공서 업무를 막무가내로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 급할 때는 역시나 <현장 박치기>


그래서 생각해낸 게 <줄을 서보는 것> 이었습니다. 한 지인의 말이 미국에는 아직도 인터넷 안 하고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관공서의 경우 예약 시스템 외에 현장 접수도 받는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결연한 마음으로 면허시험장을 찾았습니다. 면허시험장이 문 열기 전인데도 아침 일찍부터
긴 줄이 있었습니다. 전에 필기시험 보러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줄이었습니다. “이건 또 뭐지?”하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면허시험장 문이 열리고 차례로 들어갔습니다. 줄이 약간 길긴 했지만 생각만
큼 오래 걸리진 않더군요.


무인 단말기를 사용할 것도 없이 안내 데스크에 서 있는 직원이 무슨 업무 때문에 왔냐고 물었습니다.
실기시험을 보러 왔다고 하자 이쪽 창구로 가라고 안내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예약이 끝났습니다.
(인터넷 접수만 받을 경우 고령층이나 소외계층처럼 인터넷 사용이 어려운 사람은 접수를 할 수 없다
는 점을 고려해 현장 접수 정원을 따로 관리하는 듯 했습니다.)


그제서야 ‘아! 그런 거였구나.’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전에 실기시험 떨어지고 담당자가 말했던
시간, 그러니까 7시 30분은 면허시험장이 문을 여는 시간이었습니다. 필기시험 합격 직후에는 예외적
으로 바로 실기시험 기회를 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따로 예약을 해야 하는데 이게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차라리 아침 일찍 줄을 서서 시험을 보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이었던 겁니다.


▣ 1번 차선에 설까? 2번 차선에 설까?


시험을 빨리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할 일이 있어 예약시간 전에 시험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일찍 온
덕인지 시험장은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차선이 2개. 어디에 설 까 고민하다 위험을 줄이자는 생각에
차가 서 있는 쪽인 2번 차선에 차를 댔습니다. 잠시 뒤 시험을 보려는 차들이 줄줄이 들어왔습니다.


뿌듯한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시험감독관들이 1차선 차들만 시험
을 치고 2차선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제 뒤쪽으로 줄을 서려던 차들도 급히 1차선으로 방향을
바꾸더군요. 저도 뒤늦게 차선을 바꾸려 하자 감독관이 사뭇 험악한 얼굴로 안 된다고 차를 가로 막았
습니다. 한 바퀴 빙 돌아서 다시 줄을 서라고 했습니다. 억울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앞에 서 있던 차가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앞차 운전자에게 차를
좀 빼달라고 말하자 그 감독관이 다시 쫓아왔습니다. 앞차 운전자에게 “시험 합격하고 임시 면허증
받으려고 서 있는 거죠? 그냥 기다리세요.”라고 말한 뒤 또 못마땅하다는 듯 저를 바라봤습니다.
‘이거 시험은 보기도 전에 또 떨어지는 건 아닌지’ 식은땀이 나더군요.


앞을 가로막고(?) 있던 차가 합격증을 갖고 옆길로 빠져 나가자 곧장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차를
피해 옆길 대신 앞으로 갔는데… 아뿔싸… 그게 그만 실기 시험장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앞뒤로 왔다
갔다하며 평행주차를 시도하는 시험차량에 또 다시 발이 묶였습니다. 무조건 기다려야 했지만 화도 나
고 마음도 급하고 해서 시험 차량을 차를 앞질러 나왔습니다. 실기시험 보실 때 차선 잘 보고 서시기
바랍니다.


우여곡절 끝에 본 시험은 별 탈 없이 끝났습니다. 시험감독관이 내리면서 “Good Job!”이라고 한마디
해주더군요. 임시 면허증도 그 자리에서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운전하다 가신 분들이라면 사실 실기시
험 자체는 크게 걱정하실 게 없습니다. 다만 평행주차는 한 번 정도 연습해보고 가시게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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