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 미국의 극단화
최근 수 년 간 한국 언론의 극단화(Polarization)를 우려하는 국민이 많이 늘어났다. 언론의 정치적 지향성에 따라 언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며, 보도하고 싶은 것만 보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온 이후 미국 방송 등 언론들을 보면서 한국은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은 나름 형식적 균형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성의라도 보인다. 즉, 기본적으로 상대 진영의 입장이나 반론을 실어준다든가 한쪽의 입장과 주장만 일방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면, 미국 언론은 정치적 성향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상대 진영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도 주저하지 않는 등 이른바 상도의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CNN과 폭스뉴스의 대립각이다. 미국 뉴스 전문 방송의 대표 주자들인 두 방송에선 사실 ‘뉴스’를 보기 드물다. 우연히 만난 한 미국인은 “미국 방송엔 뉴스는 없고 오피니언만 가득하다”고 꼬집었다. 실제 그러하다. 두 방송은 하루 종일 패널과 자사 기자, 앵커들을 연결해 특정 이슈를 놓고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프로그램들을 계속 내보내고 있다. 아주 간혹 특정 이슈의 대립각을 세우는 두 당사자를 함께 초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 방송이 하고 싶은 말만 전달하고 끝난다. 거의 모든 주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CNN은 24시간 내내 그의 말과 행동을 사사건건 문제 삼는 패널 토론만, 폭스뉴스는 트럼프 대통령을 방어하고 야당인 민주당을 공격하는 패널 토론만 송출하고 있다. 때로는 상대 방송에 출연한 패널의 발언을 해당 방송사 영상과 함께 비판하기도 한다.
사진 1)4월 말 미국의 스테이앳홈(자택격리) 명령에 대해 일부 공화당 주지사가 집권하는 주를 중심으로 경제 활동 재개 움직임이 나타나자 CNN와 폭스뉴스가 같은 현상을 놓고 180도 정 반대의 해석을 하는 모습. CNN은 트럼프 지지자를 중심으로 한 시위가 주지사들을 압박하고 있다는 점, 폭스뉴스는 경제 봉쇄에 힘들어하는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자 주지사들이 이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으로 논리를 엇갈려 전개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건이 장기간 양사가 전쟁을 벌였던 1차전이었다면,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건은 2차전이다. CNN은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에 대유행이 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판단을 잘못하고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은 탓, 즉 무능력한 대통령 탓이라는 게 시종일관 같은 논조다. 반면, 폭스뉴스는 트럼프 대통령은 할 만큼 하고 있으며, 팬데믹(Pandemic)의 책임을 중국과 WHO, 민주당 출신 주지사들에게 돌린다. CNN을 시청하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극대화한다. 폭스뉴스를 시청하게 되면 충분히 통제 가능하며 그렇게 치명적인 유행병은 아니라는 느낌을 얻는다. 이 때문에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이 전혀 다르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따라 전면 봉쇄된 경제활동도 공화당 소속 주지사가 집권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조기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반면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통치하는 지역에선 아직 그 시점이 이르다는 엇갈린 주장이 나온다.
미국 방송의 사례를 언급하는 이유는 사실 미국인의 속내와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 느낀 것이지만 미국인들은 150년 전의 남북전쟁(Civil War)이 만든 상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엔 노예 해방을 통해 노동력을 공급받아 상공업을 키우기 원했던 북부와 노예제도를 지켜 농업 기반을 유지하려 했던 남부의 전쟁이 지금은 다소 변형된 형태로 연장전이 치러지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해봤다. 특히 트럼프 시대 들어 미국민들 사이에선 묘한 갈등이 형성됐다. 북부 출신인 한 미국인은 남부 여행을 준비하는 기자에게 “아직도 남쪽 시골 백인 중엔 자기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자녀들에게 ‘너희 몇 대 할아버지가 ‘Northerner(북쪽 애들)’한테 살해당했다’며 남북전쟁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며 “남쪽으로 갈수록 외국인들에게도 거부감이 강한 백인들이 많으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 깜짝 놀라기도 했다.
사진 2)2018년 8월 UNC 학생들이 교정에 세워져있던 남부군 동상 철거를 시도하는 모습.
내가 살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주도 과거 남부군에 속했던 지역이다. 교외를 나가면 강성 트럼프 지지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2년 전 만해도 내가 소속된 UNC 채플힐 교정 내엔 ‘사일런트 샘’이란 명칭의 남부군 기념 동상이 있었다. 2018년 여름 백인우월주의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동상 철거 운동을 펼쳤지만 이를 막아 세운 것은 놀랍게도 UNC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이 또한 전통인데 왜 없애냐”는 논리였다. 결국 대학 총장이 고심 끝에 를 철거하자, 막강한 힘을 가진 동문들은 이 총장을 사퇴시켰고 한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애칭은 ‘타르힐(Tar Heel)’이다. 스포츠가 강한 UNC 채플힐 대학생도 타르힐이라는 애칭에 자부심이 강해 응원단 이름으로도 사용한다. 실제 타르힐은 전쟁에 결코 물러서지 않고 용기가 있는 군인을 상징한다. 왜 타르힐이라는 말이 탄생했는지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남부군의 명장이었던 로버트 리(Robert Lee) 장군이 당시 남부권에 속했던 12만5000명의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이 마치 노스캐롤라이나의 특산품인 끈적끈적한 타르(Tar)를 전투화 바닥(Heel) 뒤에 붙이고 결코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을 보였다고 칭찬한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사진 3)UNC 대학 기념품 매장 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타르힐’ 상품.
결국 현재 트럼프 시대에 심화하고 있는 미국 내 이념과 진영의 갈등은 상당히 뿌리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패배자의 입장에서 마음 속 깊게 간직해오던 슬픔과 솔직한 이기심, 피해의식 등을 트럼프 대통령이 자극해 분출시켰다는 것이 내가 느끼는 미국의 현주소다. 이 때문에 나는 최근 코로나바이러스가 혹시나 미국의 백인우월주의를 자극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오는 8월 초 귀국 때까지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