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인상깊게 들었던 말들 가운데 하나가 ‘펀(FUN)’입니다. 다른 도시를 여행하거나 골프를 함께 치거나, 운동을 함께 하거나, 다른 어떤 일을 함께 할 때 미국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바로 “Have Fun!”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아마도 “Just enjoy!” 또는 “Don’t be serious!”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Fun’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우리말로 단순하게 “즐겨라”는 의미로만 볼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Fun’의 의미를 해석하고 되새겨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2-3년새 이른바 ‘펀경영’이라는게 기업들의 화두가 되기도 했습니다. 펀경영과 관련한 책들도 많이 출판됐고, 3년전쯤인가에는 한 유명 재미교포 여성 기업인이 국내에 ‘펀경영’을 소개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한국 사회에서 바라보는 ‘펀경영’이란 유머스럽고, 즐겁고, 직원을 편하게 해주는 리더십을 통해 직원들의 활력있고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경영방식으로 해석되는 듯합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펀경영을 통한 ‘신바람나고 즐거운 일터 만들기’, ‘직원이 만족하고 행복한 일터 만들기’ 등으로 개념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Fun’의 개념은 이보다 훨씬 차원이 깊고 넓은 개념으로 보입니다. 또 근본적으로 우리와는 다른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배경을 알아야만 ‘Fun’의 정확한 개념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문자 그대로 ‘Fun’이라는 단어 뜻에 얽매여서 ‘펀경영’이라는 것도 단지 ‘재미’ ‘유머’ 또는 이를 위한 ‘일회성 이벤트’ 등으로 개념이 축소되거나, 수박 겉핥기식 따라하기에 그칠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Fun’의 개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 9월초 제가 다니는 UNC 대학의 복싱클럽에 가입해 파릇파릇한 미국 대학생들과 함께 운동을 하면서부텁니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밤 8시부터 10시까지 두시간씩 말 그대로 입에서 단내나게 뛰고 구르며 운동하는데, 8시 정각에 클럽회장 학생이 ‘Let’s have fun!”이라고 소리를 지른 뒤 운동을 시작합니다. 남녀 구분없이 사람을 헉헉대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운동을 하는데 왜 ‘fun’이라고 할까?
42살의 나이에 20대 초반 학생들과 권투를 한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편하게 골프나 치지 웬 권투냐고 말합니다만, 40대의 새로운 도전이랄까요? 20대 한창인 학생들과 운동을 함께 하면서 때로 힘에 부칠때도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이랄까, 문화적 바탕도 배우고, 이른바 ‘Fun’의 개념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입니다.
그럼 먼저 간단히 UNC 복싱클럽에서 하는 운동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렸지만,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밤 8시부터 10시까지 두시간씩 운동을 하는데, 두시간을 런닝-PT-복싱기술 연마,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누고, 학생들을 3개조로 나눠서 조별로 돌아가면서 세가지 운동을 모두 하게 합니다. 운동은 2시간동안 쉬지않고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하는데, 남학생과 여학생, 연령, 학년에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참여하는 학생 수는 남학생과 여학생을 합쳐서 60여명 정도인데, 여학생 숫자가 3분의 1 가까이 됩니다. 이곳 학생들이 두시간동안 운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 한국과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첫째, 매주 누가 나오고 안나오는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른바 출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두 세번을 잇따라 안나오더라도 아무런 잔소리도 없고, 이전 시간에 빠져서 배우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둘째, 운동을 할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남학생과 여학생, 연령, 학년에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합니다. 선배라고 뒷짐지고 지시만 하는 일도 없고, 여학생이라고, 나이가 많다고 특별히 봐주거나 잘 대해주는 것도 없습니다.
셋째, 운동을 자율적으로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함께 운동을 하다가 본인이 지치고, 감당하기에 힘들다고 생각되면 아무 때나 잠시 한쪽에 가서 쉬었다가, 다시 운동에 참여하면 됩니다. 또, 다른 학생들은 모두 ‘팔굽혀 펴기’를 하는데, 자기는 팔굽혀 펴기가 힘들다고 생각되면 제 자리에서 다른 운동을 해도 됩니다. 선배
학생들 누구 하나 억지로 하라고 강요하거나, 왜 그렇냐고 간섭하지 않습니다. 다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해주는 분위깁니다. 여학생들도 남학생들과 함께 운동하다가 힘들면 한쪽에 가서 쉬었다가 돌아오면 그만입니다.
넷째, 기합이 없습니다. 위 세 번째 내용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만, 학생들이 운동을 게을리한다거나 요령을 피운다고 해서 선배 학생들이 기합을 주거나 잔소리를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요즘 한국 대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다섯째, 복싱기술을 가르칠 때도 진도를 빨리 나가면서, 우선 복싱에 재미를 붙이게 하고 개인들의 차이를 인정해줍니다. 2-3주 정도 기본 기술을 가르쳐준 뒤에 곧바로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치거나, 두사람씩 조를 짜서 한사람이 상대방의 펀치를 받아주게 합니다. 11월부터는 스파링도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처럼 기본이 중요하다면서 자잘한 것부터 지겹게 가르치며 배우려는 사람의 진을 빼놓지 않습니다.(중국 무협영화 보면 다 그렇죠!)
미국에서 골프레슨을 받는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한국에서는 실내연습장을 가면 6개월은 레슨을 받아야한다고 합니다만, 이곳에서는 6차례 받는게 전붑니다.(물론 본인이 원하면 더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7번 아이언클럽을 가지고 기본 자세를 익혀야한다며 처음 한달 정도는 지겹게 기본 스윙만 하게 하는데, 여기서는 아이언 클럽 몇 번 쳐보고는 곧바로 드라이버도 사용하면서 우선은 볼을 치는 재미부터 갖게 합니다. 이때도 미국인 레슨 강사가 하는 말은 “Have fun!”입니다.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기본기를 약하게 다진다고 봐서는 안됩니다. 강압적인 방식으로 배우는 것보다는, 일단 재미를 붙이고 본인이 흥미를 갖게되면 자율적인 훈련과 경쟁을 통해 훨씬 충실한 기본기를 다질 수 있고, 그만큼 환경이 좋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학생 수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납니다. 한국에서는 힘든 운동 써클의 경우, 처음에 가입했던 학생들이 힘들다며 하나둘씩 탈퇴하면서 학생 수가 줄어드는게 보통인데, 이곳 복싱클럽은 힘든 운동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학생 수가 처음 30여명보다 20명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물론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들도 몇 명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기존 회원들의 소개나 소문을 듣고 새로 나오는 학생들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또 몇 달 먼저 가입했다고 해서 기득권을 갖는 것도 없습니다.
일곱째, 가입에 특별한 조건을 두지 않습니다. 한국처럼 신입생들만 가입하는게 아니라, 2학년이나 3학년, 대학원생들도 새로 가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대학생인 아들과 함께 나와서 운동을 하는 40대 후반의 아빠도 있고, 딸과 함께 나와서 운동하는 엄마도 있습니다. 나이 서열로는 제가 4번쨉니다.
이밖에도 다른 점들이 많습니다만, 어떤가요? 대학생 복싱클럽에서만 봐도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이른바 ‘펀(fun)’의 개념에 대해 어렴풋이 잡히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