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아이에게 예방주사(백신)를 제 때 안 맞히면 친구들과 놀기 어렵다. 엄마들이 생일
파티나 함께 놀도록 할 때(play date) 예방접종 했는지 묻는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종종 들었던
말이다. 아이에게 필수 예방접종을 비롯해 해마다 인플루엔자(계절독감) 백신까지 꼬박 꼬박 챙겨
맞혔지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국의 의료기관에서 결핵 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제출하도록 하는 것을 보고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의사
자격증을 가진 소아과에서 기본적인 건강검진과 결핵 검사 결과까지 받았기에 그것을 제출하겠다고
했지만 Fairfax county 교육청에서는 “비행기에서 감염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미국에
서 다시 검사 받을 것을 요구했다. 기분은 많이 상했지만, 우리나라가 OECD 국가 가운데 결핵환자
발생률이 가장 높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도록 했다. 초등
학교 입학을 위한 검진이 가능한 소아과를 찾아 예약을 하고 병원을 찾아갔고, 우리가 든 건강보험
으로는 일반 검진이나 검사는 커버되지 않아 꽤 많은 돈을 내야만 했다.
Minute Clinic을 아시나요?
10월 초부터 본격적인 인플루엔자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병원들뿐 아니라 학교, Mart에 까지 독감
예방백신을 권유하는 포스터가 붙었다. 내가 다니는 존스홉킨스 대학교 SAIS 대학원에서는 모든 학
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무료 독감 백신 접종을 시행했다. 날짜를 정해서 학교 건물에 직접 의료진
이 찾아와 백신을 접종해주거나 인근 편의점에서 맞을 수 있다며 편의점 list를 첨부해 이메일을
보냈다.
‘편의점에서 예방접종을 해?’
알아봤더니 학교에서 지정한 Walgreens뿐 아니라 CVS, COSTCO, TARGET까지 약품을 판매하는
잡화점이나 대형 마트에서도 계절독감 백신을 맞을 수 있었다. CVS는 그야말로 convenience store
(소형 소매점포)다. 웬만한 약품은 이곳에서 모두 구할 수 있다. 이곳에서 아이에게 독감 예방백신
을 맞히기로 했다. 예약 없이 우리나라 동네 병원처럼 그냥 가는 곳(walk-in)이라고 해서 ‘오~
이렇게 편할수가. 한국이랑 똑같네?’라며 집 근처 CVS를 찾았다.
Flu shot을 맞으면 20%할인 쿠폰을 준다고 해서 CVS를 선택했다고는 말 못한다.
‘Flu shot here’라는 간판이 붙은 곳에 가서 줄을 섰다. 약 15분 만에 내 차례가 됐다.
나: 아이에게 독감 예방접종 하러 왔는데요.
CVS 약사: 이곳에 있는 약사들은 18살 이상 어른에게만 주사를 놓을 수 있어요.
나: (헉! 약사가 주사를 놓는다고?) 우리 아이는 8살인데요.
CVS 약사: 아, 그럼 8살 아이가 주사 맞을 수 있는 근처 다른 CVS를 알려드릴게요.
다시 차를 몰고 15분쯤 갔나 보다. 적힌 주소대로 옆 city의 CVS에 갔다. 다시 줄을 섰고, 약 10분
쯤 기다렸다.
나: 8살 아이에게 독감 백신 맞히러 왔어요. 여기서 주사 맞을 수 있다던데요.
다른 지역 CVS 약사: 아, 맞아요. 여기서 8살 어린이 백신 맞을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일
하는 사람 중에는 어린이에게 주사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내일 다시 오시죠? 내일은 하루 종일 아무 때나 오셔도 되요.
나:(우쒸!) 네…
할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CVS를 찾았다. CVS 내부에 있는 Minute clinic 이라는 작은 방이었는데,
등록을 한 뒤 정확히 한 시간 18분 만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예방접종, 인후염, 방광염, 간단한 피부염, 혈압 등 간단한 검사가 가능한 기초 진료기관
여기서 문제!
대기 시간 1시간 18분, 우리 앞에 대기 환자는 몇 명이었을까요? 당시 진료받고 있는 환자를 포함해
3명이었다. ‘뭔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진료해 주나 보다. 치료비가 엄청 비싸다더니 우리나라 3분
진료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나?’ 싶었다. 얌전히 앉아 엄청난 대기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흰 가운을 입은 중년 여성 혼자였다. 친절하게 아이가 백신 맞은 경험이 있는지, 부작용은
없었는지, 특별한 알레르기가 있는지 물었다. 또 독감 백신에 두 종류가 있다며 3가 백신(쉽게 말해
3종류의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다)과 4가 백신(4종류 바이러스 예방 효과) 중에 뭘 맞힐 것인지 물었
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주사를 놨다. 천천히 약 상자에서 주사제를 꺼내 와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위생장갑을 끼고, 한참 동안 알코올 솜을 문지른 뒤 주사를 놨다. 슬로우 모션을 보는 듯 했다.
(같은 행위를 한국에서 했다면 1분도 안 걸렸을 거라 생각한다) 음… 그래도 5분이 채 안 걸렸다.
열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주의사항도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돈 계산을 직접 했
다. 4가 백신이 37달러 정도 했다. 보험사를 물었고(미국에서는 대부분의 보험으로 계절독감 백신이
커버된다고 했다) 아이에게 ‘너처럼 주사를 잘 맞는 아이는 없었다며’ 한참 추켜 세웠다. 그래도
이틀에 걸쳐 CVS를 세 번이나 찾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린 게 너무도 억울하여 내가 그냥 짧은 인터뷰
를 하기로 맘 먹었다.
나: 우린 외국인인데, 미국에서는 다들 독감 예방주사 맞아요?
의료진: 지역에 따라 많이 달라요. 이 지역은 대부분이 맞는 것 같아요. 교육 수준에 따라 달라
지는 것 같아요. 교육 수준이 높은 지역은 확실히 접종률이 높은 것 같아요.
나: Minute clinic에서는 예방주사만 놓나요?
의료진: 아니예요. 기본적인 primary clinic 이라고 보면 되요. 혈압이나 혈당, 열, 혈액검사
가 아닌 기본적인 검사를 받을 수 있고 인후염이나 방광염, 벌레에 물린 등의 가벼운
피부염 등도 치료받을 수 있어요.
나: 의사신가요? 아니면 간호사인가요?
의료진: 난 practitioner예요.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고 그 중간쯤이죠.
예방백신 접종뿐 아니라 가벼운 진료를 할 수 있어요.
나: minute clinic을 많이들 이용하나요?
의료진: 네, 여기는 1년 365일 문을 열고, 그냥 아무 때나 예약 없이 walk in이 가능하고 병원
응급실은 너무 비싸고,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요.
취재를 좀 해 봤더니, 이 기초 의료기관의 practitioner는 간호사인 경우도 있고, 의료보조사
(physician assistant)인 경우도 있었다. 내가 만난 사람은 후자의 경우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존재인
데, 기본적인 진료와 약 처방이 가능하고 어느 정도 훈련을 받으면 외과 의사 수술을 보조하는 역할
등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예방접종은 특별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나 간호사
가 아닌 제한된 자격을 가진 의료인이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의사들을 만나기
쉽지 않고 워낙 병원비가 비싸기 때문에 생긴 틈새 시장이 아닌가 싶다.
CVS의 경우에는 미국 전체 중 28개 주와 워싱턴 DC에 800개가 넘는 Minute clinic을 운영하고 있고,
2000년에 처음으로 walk-in 개념을 clinic에 도입했다고 한다. 물론 의료진의 자격을 두고 미국 내에서
도 논란이 있다. 미국 소아과 학회에서는 의사가 아닌 practitioner가 진료하는 ‘가벼운’ 질병이 결코
가벼운 질환이 아닌 경우가 많다며, 특히 어린이들은 이런 minute clinic 진료를 받지 말 것을 권고하기
도 했다.
하지만 접근성 높은 마트의 ‘작은 병원’은 나름 효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계절독감
백신 접종률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성인이 43.6%, 17세 이하 어린이는 59.3%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성인
이 34% 정도에 그친다.(65세 이상 노인은 무료 접종으로 접종률이 88%에 이르기 때문에 20대~50대 접종
률은 한참 저조할 것이다) 동네 마트에서 장 보면서 쉽게 맞을 수 있는데다 비용도 보험에서 보장받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사회 분위기가 ‘내가 독감에 걸려 고생하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에게 감염
시킬 수 있는데 이건 더 큰 일이다’인 것도 한 몫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병원 문턱이 워낙 높고 의료
비용이 엄청나게 비싼 사회이다 보니 질병 예방에 더욱 신경 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나저나 미국에서는 ‘감히’ 아프지 말아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