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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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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젠트리피케이션

시애틀은 점점 테크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제2의 실리콘밸리라고 자부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도시가 성장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몰리고 그러면 인프라가 더 깔려서 도시가 더욱 발전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젠트리피케이션, 물가가 비싸지면서 기존에 살던 사람들이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일도 벌어진다. 시애틀의 한국인 비영리 단체의 푸드뱅크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1. 젠트리피케이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LA만큼은 아니지만 시애틀의 집값은 점점 오르고 있다. 지난해 시애틀의 집값 상승률은 30년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신용평가기관 S&P는 지난해 12월 시애틀이 1년 사이 20.2% 상승률을 보였다고 발표했다. 1년 사이 미국에서 집값 상승률이 높은 도시 3위였다.

물가도 덩달아 오른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소고기 새우살은 한국에선 상당히 비싸지만 미국에선 사 먹을만하다고 말하는 부위다. 필자가 지난해 8월 도착했을 때 파운드당 23달러 안팎이었는데 지금은 30달러를 넘을 정도로 올랐다.

한달에 한번 시애틀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에서 하는 푸드뱅크 봉사를 가고 있다. 쌀, 라면, 사골국, 미역, 고추장 등 한국 음식 재료들을 담는 일이다. 처음에는 이걸 받으러 오는 한국인이 있을까 싶었다. 내심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특히 테크 도시로 부상 중인 시애틀에는 아마존, 페이스북, MS 다니는 고소득자만 모여 사는 줄 알았다.

큰 착각이었다. 예상과 달리 비가 오는 날임에도 준비한 식재료 봉지는 2시간 안에 동이 났다. 지난해 12월 시작한 한인 푸드뱅크는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재료가 동이 나는 시간이 점점 빨라졌다.

푸드뱅크에 식재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 대부분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또는 자동차 유리창 앞에 장애인 카드를 달고 오신 분들이었다. 비영리단체 직원 말로는 테크 인재들이 몰려들어서 기존 터전에서 밀려나게 된 한국인들, 특히 이민 1세대들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진다고들 한다. 거동이 어려워 나오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었을 거라고 한다.

워싱턴주에서 교회나 종교 단체가 아닌 한국인 비영리 단체에서 푸드뱅크를 운영한 적은 별로 없다고 한다. 한번은 식재료를 분류하며 봉투에 담고 있는데 근처 사는 한국인 할아버지가 찾아오셨다. 할아버지는 “미국에 40년 살면서 한국 음식 나눠주는 건 처음 본다”고 말씀하셨다.

2. 한국인에게 푸드뱅크란.

미국 사람들에게 푸드뱅크는 상당히 친숙하다고 한다. 대부분 각 지역마다 비영리단체 개념으로 푸드뱅크가 있다. 식재료도 나눠주지만 어른 기저귀, 샴푸, 손소독제 등을 비롯해 반려동물 패드까지 나눠준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코로나 여파로 온라인으로 사전 신청을 해야 음식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있고, 등록절차 없이 아무 때나 가서 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대부분 소득 요건 등을 요구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접근성이 뛰어나지만 사실 한국인에게는 그리 접근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비영리 단체분들과 미국의 푸드뱅크를 직접 방문한 적이 있다.
기본적인 식재료가 대부분 미국 식생활에 맞춰져 있었다. 당연한 소리이지만. 녹색콩 통조림, 토마토 페이스트 통조림, 생크림, 베이컨 등은 한국인들이 요리에 자주 넣지 않는 식재료이다보니 이러한 재료들을 받아봐야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특히 한국인에게 여전히 푸드뱅크의 문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데 있어 보였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도 아닌 유통기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푸드뱅크에서는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또는 명시된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먹을 수 있는 상태라고 판단되면 나눠주기도 한다.

이 푸드뱅크의 디렉터에게 유통기한 문제로 항의하는 사람은 없느냐고 물었다. 대부분 여기로 음식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런 부분 때문에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기네로서는 미안하다고 하고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달리 표시하자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관련한 법률이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 뇌리에 박힌 인식을 뛰어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먹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명시된 유통기한 BEST BY 가 지난 재료를 받았을 때 한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의문이었다. 이런 부분 때문에 한국 사람들을 위한 푸드뱅크를 운영하는 비영리 단체도 고민이 많다고 했다.

3. 기부

한국이든 미국이든 푸드뱅크가 활성화되려면 가장 중요한 건 기부다. 특히 푸드뱅크로 오는 식재료는 개인의 기부 보다 대형 마트나 식품회사들의 기부 비중이 더 높다. 미국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기업의 기부는 세제 혜택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여파로 기부는 늘었을까. 줄었을까. 물론 수치화된 자료를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현장 관계자의 말은 상당히 와닿았다.

“코로나가 처음 발생했던 해에는 오히려 기부가 늘었다. 사람들이 재난=기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장기화되면서 기부가 계속 늘어나진 않는다. 정체됐다. 그에 반해 물가는 오르기 때문에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물건들은 줄어들고 있다.”

재난이 길어지면서 기부로 운영되는 미국 사회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 사회에서 한국 기업들의 기부도 늘어나 좋은 인식을 심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들었다. 시애틀에서 운영되는 한국 푸드뱅크도 기부까지 더해져 오랫동안 지속되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