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의 낭만, 공원과 공연장이 만났다.
“뭐? 스팅의 공연을 단돈 35달러에 볼 수 있다고? 그것도 야외 공연장에서?”
도대체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긴가민가하면서도 이건 대박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스팅의 공연을 4만원이나 5만원에 보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휴대전화로 동네 주요 행사 일정을 알려주는 구글맵의 기능을 알고 나서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울프 트랩(Wolf Trap)이었다.
그림 1울프트랩 예술공연 센터 앞에서 시민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미국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돼 집안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공연 관람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있었지만 스팅의 공연을 그것도 단돈 35달러에 볼 수 있다면 좀 무리더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미국 워싱턴 DC 인근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 비엔나 시 근처에는 ‘울프 트랩 국립공원’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차로 10분 안에 갈 수 있는 공원인데 살림이 아주 울창해서 길가에 가끔 사슴이 보인다고 한다. 이곳에 아주 근사한 야외 공연장이 있다.
원래 이 공원은 농장으로 사용되던 사유지였다고 한다. 캐서린 필렌 쇼우스 여사 소유였던 이곳은 66핵타(0.66㎢) 규모인데 도심개발로 워싱턴이 커지면서 캐서린 여사가 1966년 의회에 기증하면서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당초 이름은 ‘울프 트랩 농장 공원’이었는데 2002년 8월부터 울프트랩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 공원은 국립공원인 만큼 당연히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이 관할하는데 이들은 독특한 생각을 해냈다. 캐서린 여사가 기증한 땅을 관리하기 위해 비영리 재단인 울프 트랩 공연예술재단을 설립한 것. 공원과 예술 재단이 초기부터 합작으로 공연을 위해 머리를 맞댄 것이다. 이렇게 워싱턴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공연과 예술교육을 위해 1971년 설립된 것이 바로 울프 트랩 예술공연센터다. 캐서린 여사의 이름을 따 공연장은 필렌 센터로 불린다.
그림 2울프 트랩 야외공연장에서 시민들이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공연은 5월부터 9월까지 이뤄지며 실내(3800명)와 잔디밭이 있는 야외공연(3200명)장이 결합된 모두 7024석 규모의 대규모 공연장이다. 개장 이후 다녀간 관람객만도 1000만 명이 넘으며 매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다녀간다고 한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스팅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역시나 티켓은 모두 매진이었다. 잔디밭에 앉아 볼 수 있는 35달러짜리 티켓부터 제대로 된 의자에 앉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160달러짜리 티켓까지 스팅의 공연은 사흘 내내 한 장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거의 날마다 공연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 장르도 다양하다. 오페라부터 뮤지컬, 클래식, 록, 컨트리, 팝, 재즈, 블루스 등 자신이 원하는 장르를 찾아 가족이나 연인, 친구와 함께 즐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올해 울프 트랩의 대표적 행사는 아쉽게도 내가 연수로 이곳에 오기 전인 지난 5월 27일 메모리얼 데이를 기념해 열린 대통령 전속 해병군악대 연주였다. 대통령 전속 해병군악대는 200년 전인 1798년 창단돼 백악관 연주회를 비롯하여 연간 500회가 넘는 연주회 기록을 갖고 있는 관록 있는 연주 단체였다. 메모리얼 데이 기념으로 입장료도 받지 않는 공짜 공연이었다고 하니 당연히 사람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그림 3공연이 끝난 뒤 울프트랩 공연장의 모습. 잔디밭과 좌석이 맞닿아 있다.
또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6월 14일부터 8월 4일까지 연주회를 가졌다. 7월 12일에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 깎기 인형’ ‘로미오와 줄리엣’ 등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을 연주했다.
해병군악대 연주와 함께 올해 울프 트랩의 또 다른 큰 행사였던 스팅의 공연을 눈앞에서 놓친 나는 대신 미국 가수 벤 하퍼의 ‘트롬본 쇼티’ 공연을 선택했다. 싱어송 라이터로 블루스와 록 기타 연주자인 그는 탁월한 기타 연주 테크닉을 발휘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지미 핸드릭스의 블루스와 알 그린의 소울, 밥 딜런의 정신을 소유했다는 주장도 하는 모양이다.
현란한 테크닉을 선보인 그의 연주에 그 흔한 야외용 돗자리도 없이 신문지만 달랑 들고 간 나는 아내와 한여름 밤의 공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5000명이 넘는 관객들은 비가 살짝 흩뿌리는 날씨에서도 벤 하퍼의 열정적인 공연에 열광했다.
그런 울프 트랩은 공연만이 아니라 아이들 교육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울프 트랩 영유아기 예술 학습기관’(Wolf Trap Institute for Early Learning Through the Arts)’에서 통합적 예술교육을 하고 있다. 영유아부터 7세까지의 아동을 대상으로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과학, 기술, 공학, 수학 등을 예술로 배우며 언어 능력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림 4울프트랩 공연장 잔디밭에 시민들이 한가롭게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다른 미국인이 모두 아이스박스와 캠핑용 의자까지 가져와 잔디밭에 앉아 여유롭게 공연을 보면서 가족이나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공원과 공연장의 만남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다음번에는 피크닉 박스를 가져와 맛있는 간식도 먹고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집에서 겨우 10분만 차를 타고 오면 울창한 숲에 아름다운 공연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러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우리도 동네 주민 가까이에 공연장과 공원이 결합된 문화상품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