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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에 진심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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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할로윈 데이가 지나고 나니 부쩍 쌀쌀해졌습니다. 단풍도 정점에 달했고요.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이번 가을을 풍성하게 채워준 할로윈 데이에 대해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이곳에선 할로윈이 한참 남은 9월 말부터 할로윈 시즌을 알리는 이벤트들이 시동을 걸더군요. 할로윈 풍의 음악을 레퍼토리로 연주하는 할로윈 콘서트가 열리고, 교외 농장에선 방문객이 직접 호박을 골라 갈 수 있는 ‘펌킨 패치(pumpkin patches)’가 시작됩니다. 물론 할로윈 호박은 마트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직접 농장을 방문하면 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어 자녀가 있는 분들은 대부분 농장에 한 번씩 가는 것 같습니다. 건초 깔린 트랙터를 타고 농장을 한 바퀴 도는 ‘헤이 라이드(hayride)’는 물론 집라인, 미끄럼틀 등 각종 어트랙션도 탈 수 있으니 피크닉으로 제격이죠. 초대형 호박인 ‘빅맥 펌킨’에 거위 목처럼 길게 구부러진 ‘구스 넥 펌킨’, 흰색 미니 호박 등 난생처음 본 호박들을 잔뜩 구경했습니다.

펌킨 패치를 하러 간 농장. 트랙터에 왜건을 연결해 만든 헤이 라이드(hayride)를 타고 농장을 한 바퀴 돈다. 지루하지 않게 중간중간 카우보이가 쇼를 하고 유령의 집을 통과하며 퀴즈도 맞춘다.

그렇게 사 온 호박에 눈, 코, 입을 뚫고 안에 촛불을 넣어 밝히는 ‘잭 오 랜턴(jack-o’-lantern)’ 만들기에도 처음 도전해봤습니다. 손재주가 없는 터라 걱정이 컸는데 저 같은 초보들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키트가 있더군요. 호박 조각칼이 들어 있는 세트를 사면 그 안에 눈, 코, 입 디자인 도안 스티커가 수 십여종 들어 있습니다. 그걸 호박에 붙이고 나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선을 따라 조각을 하면 비교적 손쉽게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예상하지 못한 단점도 있었습니다. 며칠 놔두니 속을 파낸 호박 내부에 곰팡이가 생기더군요. 할로윈이 올 때까지 주기적으로 곰팡이를 제거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었습니다. 내년 할로윈에는 잭 오 랜턴 조각은 하나만 하고 나머지 호박에는 물감으로 눈,코,입을 그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어느 회사 앞에 진열된 할로윈 호박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인기를 보여주듯 호랑이 ‘더피’ 그림을 그려넣은 호박도 보인다.

10월 한 달 내내 마트엔 호박 향(펌킨 스파이스)을 입힌 시즌 한정 상품이 넘쳐납니다. 이렇게 많은 곳에 호박 맛이 응용될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입니다. 스타벅스 펌킨 스파이스 라떼는 워낙 유명하죠? 올해는 속을 파낸 작은 호박(직접 준비)을 스타벅스 매장에 들고 가 그 안에 펌킨 스파이스 라떼를 담아 가는 게 SNS를 타고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습니다. 이래저래 가을엔 호박이 다다익선인 것 같습니다.

마트 진열대에 호박 향을 추가한 스낵들이 가득하다.

할로윈 데이가 임박하면 학부모들도 바빠집니다. 10월 초부터 코스튬이 필요했습니다. 태권도장 같은 각종 학원에선 할로윈 데이를 앞두고 친구 초대 할로윈 이벤트를 하는데, 이때 복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죠. 또 할로윈 당일이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코스튬을 갈아입고 동네 퍼레이드를 합니다. 열정맘들은 손수 제작해 입히기도 합니다. 저는 그냥 시중에 나와있는 제품을 사 입혔습니다. 할로윈 코스튬과 장식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스피릿 할로윈(spirit halloween)’이란 매장도 있으니 의상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할로윈 관련 용품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매장의 모습. 아이용, 어른용, 액세서리 등 코너가 잘 나뉘어져 있어 원스톱으로 온가족의 코스튬을 해결할 수 있다.

특히 할로윈 당일엔 학교 행사 참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집니다. 아이들은 할로윈 퍼레이드 직후 교실로 돌아와 할로윈 컨셉으로 꾸며진 게임 부스(스테이션)를 돌며 활동을 이어가는데 이게 다 부모들의 자원봉사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호박, 스낵, 스티커, 각종 가랜드 등 물품을 사는 것부터 교실 꾸미기, 각 부스에서 게임 규칙을 설명하고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 끝나고 뒷정리까지 이날은 부모들의 참여가 필수입니다.

학생들이 점심 먹으러 간 사이에 학부모들이 교실을 장식했다.

저녁엔 학교 주변으로 다시 아이들이 모여 ‘트릭 오어 트릿(Trick-or-treating)’을 다 함께 하는데요. 학부모들도 계속 따라다녀야 하다 보니 정말 이날 2만보는 넘게 걸은 것 같습니다. 이런 수고를 알아서인지 어느 집은 어른들을 위한 생수 스탠드를 운영했는데 그게 그렇게 고맙더군요. 이번에 한가지 제가 놓쳐서 후회됐던 것은 소형 랜턴이었습니다. 현관까지 계단이 많은 미국 집 특성상 밤중에 아이들이 발을 헛디딜까 조마조마하더라고요. 센스 있는 동료 학부모는 손가락에 끼우는 소형 랜턴을 달고 와서 아이들의 발밑을 비춰주기도 하고, 불빛이 들어오는 망토를 입고 와서 주변을 밝혔습니다.

그날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할로윈 장식을 구경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정말 할로윈에 진심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마당을 장식한 스케일이 남달랐습니다. 또 그걸 즐길 수 있는 여유도 부러웠습니다. 여름이 가고 선선해질 때 할로윈이라는 테마로 먹을거리, 집 인테리어를 바꿔보며 계절을 만끽해보는 것. 다만 올해는 미국 정부 셧다운 장기화 여파로 작년보다는 할로윈 분위기가 덜 했다는 씁쓸한 평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관공서나 정부 관련 일을 하는 집의 경우 수입이 줄어 이전만큼 분위가가 나지 않았을 수 있겠습니다. 그래로 모두들 행복한 할로윈을 보냈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장식도 기대가 됩니다. 모두들 얼마나 열정적으로 집을 꾸미고 연휴를 맞을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