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왔구나‘
문을 열어보니 제복 경찰관과 SWAT 기동대원, 해골 인간과 검은 마녀가 나란히 서있었다. “트릭 오어 트릿” 한껏 꾸미고 온 아이들에게 한국인의 정을 담아 사탕과 초콜릿을 한 움큼씩 안겨주었다. “해피 핼러윈!”
그런데 이런 핼러윈 인심마저 위축될지도 모르겠다. 인플레이션이 핼러윈 사탕 가격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부담스럽다‘는 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 ABC는 2023년을 정리하는 방송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에 대해 “미국인들이 마트에 갈 때마다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때 달러당 1300원 후반대의 고환율까지 덮치면서 마트에 갈 때마다 물건을 집었다 놨다 수많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게 달라졌다. 천정부지 인플레이션
2023년 9월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발표한 연례직장혜택 보고서(Workplace Benefits Report)를 보면 인플레이션이 임금 노동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나타난다.
전국 남녀 임금 노동자 878명을 상대로 한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 3명 중 2명(67%)은 ‘생활비가 임금 인상을 앞지른다‘고 답했다. 2022년 2월 조사 당시58%에서 9%p가 늘었다. 인플레이션과 경제적 불확실성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의 재정 상태에 대한 스트레스가 늘면서, 재정적 웰빙(financial wellness)은 42%까지 떨어졌다. 해당 연구가 시작된 201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수년전 여행이나 출장 때 경험한 미국 물가와 이번에 5개월간 생활하면서 체감한 미국 물가는 확연히 다르다. ‘인생 스테이크‘로 꼽는 뉴욕 브루클린 피터 루거의 2014년과 2023년 메뉴판을 비교해봤다. 첫 방문 땐 3인용 스테이크 가격이 149.25 달러였다. 그런데 몇 달 전 그 맛을 잊지 못해 찾아가보니 203.85달러로 올라있었다. 사이드 디시 하나에 음료 2잔, 세금에 팁까지 지불하고 나니 300달러가 훌쩍 넘었다. 당시 환율을 감안하면 한끼 식사에 40만 원 넘게 지불한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엔데믹 이후 더욱 심해진 것 같다. 2~3년전 나온 미국 여행 책자들은 ‘가격‘에 관한 한 모두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다. 무빙으로 함께 받은 모 출판사의 미국 동부 여행 가이드북(2020~2021 개정판)을 보면, 나이아가라 폭포의 필수 코스인 안개아가씨호(Maid of the mist) 요금이 성인 19.25불, 어린이 11.20불로 적혀있다. 하지만 현재 요금은 성인 28.25불, 어린이 16.50불이다. 두 부부와 아이 한 명 기준으로 보면 49.7불이 73불로 오르면서, 46.9%나 부담이 늘어난 것이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전망대는 어떤가. 86층 전망대 기준으로 같은 여행 책자엔 성인 38불, 어린이 32불로 돼있다. 지금은 성인 44불, 어린이 38불로 각각 6불씩 인상된 상태다. 이렇듯 모든 게 달라졌다. 최신 개정판마저 구닥다리 가격 정보다. 입국 직전 구입한 2022~2023 개정판 서부 여행 책자에 적힌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 성인 입장료는 25불이다. 하지만 현재 입장료는 30불이다. ‘믿고 보는 가이드북‘이라는 표지 문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구글맵 리뷰도 마찬가지인데, 1년 넘은 리뷰 속 메뉴 사진은 믿지 않게 되었다. 분명 해피아워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없어져서 골탕 먹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한 ‘팁플레이션‘까지
최저임금도 못 받는 일부 서비스 업종 노동자들의 임금을 보전해준다는 의미를 가진 팁에 대해선 미국 문화의 일부로 존중하는 입장이다. (왜 사장이 직원에게 줘야 할 임금을 덜 주고, 손님에게 부담시키는지 여전히 이해는 안 된다.) 그래도 팁을 낼 때마다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테이블에 현금으로 팁을 두고 가거나 영수증에 팁을 적고 나가던 것도 예전 식이 되었다. 요즘은 직원이 가져와 내미는 단말기에 카드를 탭하면 아주 당당하게 팁을 선택하는 창이 열리고 몇 가지 옵션 중에 골라 터치 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게 아주 고약한 게 과거엔 15~20% 사이에서 팁을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젠 18%, 20%, 22% 등 3가지 옵션이 기본으로 뜬다. 이 경우 직원이 빤히 보고 있으므로 체면상 20%를 누르게 된다. 게다가 뉴욕, 워싱턴 등 대도시에서는 아예 20%부터 시작해 22%, 심지어 25%까지 옵션을 제시하는 곳도 많다. 음식값에 세금까지 더한 가격에 4분의 1을 더 내라는 요구를 하는 셈이다. (대체 세금엔 왜 팁을 붙이나!) 또 일행이 6인 이상인 경우 기본적으로 20% 봉사료가 붙어 나오는 곳도 많기 때문에, 이중으로 팁을 주지 않도록 영수증을 꼭 확인해야 한다.
더 고약한 건 별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곳에서도 당당히 ‘봉사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스타벅스 등 셀프서비스가 기본인 일부 매장에서도 단말기에 팁 요구 옵션이 뜬다. 귀엽게 $1, $2, $3가 옵션으로 뜨면 기분 좋게 $1 정도 눌러주는 편인데, 별다른 서비스가 없으면서도 18~22% 옵션이 뜨면 괘씸한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 아직도 가장 억울한 건 푸드트럭이다. 나이아가라 폴스 주변 마을 푸드트럭에서 간단히 10달러짜리 볶음 국수 한 그릇과 음료 한 캔을 주문했는데, 사장이 내민 단말기엔 여지 없이 팁 옵션이 주르륵 떴다. 요리하는 수고야 음식값에 포함된 거고, 음료는 잔에 따라주는 것도 아니고 냉장고에서 꺼내서 주기만 할 뿐인데 별다른 서비스도 없이 팁을 요구하다니… ‘게다가 당신은 최저임금도 못 받는 종업원도 아니라 사장이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양반이 아직 내 요리를 만들기 전인데 ‘No Tip’을 누르면 혹시나 엉망으로 해서 주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소심하게 18% 팁을 누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끝은 어디인가
2023년 12월 FOMC에서 세번째 금리 동결이 결정되면서 물가가 안정세에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달러당 1360원을 넘던 고환율도 이제 종종 1290원대가 보이는 등 숨통이 트였다. (근데 꼭 환율이 올랐을 때 달러가 급하고, 환율이 떨어졌을 땐 환전할 돈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귀국 전까진 인플레이션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전력을 공급하는 듀크 에너지는3년간 순차적 전기료 인상안을 제시했다. (악천후에 툭하면 끊기는 전력망 강화를 위한 비용에다가, 탄소 중립을 위한 투자 비용이 포함된다고 한다.) 근데 인상률이 어마어마하다. 2024년 1월부터 무려 10%가 한 방에 오르고, 2025년과 2026년에도 매년 4%씩 추가로 올리겠다고 한다. 일반 가정의 경우 전기요금이 월 26달러 정도 늘어나게 된다는 계산이다. 한국에서 전기료 인상이 얼마나 어렵고 민감한 이슈인지 생각해보면 놀라운 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NC 고속도로 통행료 인상 계획도 발표됐다. 2024년 1월 1일 시행. 인상률은 3.7%이다. 여기에 우리 가족이 다니는 YMCA 스포츠센터도 새해부터 회비를 5% 가까이 올렸다. 열흘뒤 갱신되는 자동차 보혐료도 3% 넘게 인상된다. 이래저래 허리띠를 졸라맬 수 밖에 없게 됐다.
고물가·고환율 이중고 속 생존법
생수, 한국 김(엄청 큰 묶음이 9.99달러), 한국 라면(18개에 16.49달러)은 코스트코가 압도적으로 싸다. 삼겹살도 5lb(약 2.2kg)에 30불 선이라 대량으로 구매한 뒤 소분해서 냉동 보관한다.
파, 양파, 호박, 두부 등 자주 쓰게 되는 한식 재료와 우유·계란 등은 알디(ALDI)에서 구입한다. 독일계 마트 체인인데, 비닐봉지를 없애고 카트를 손님이 직접 정리하게(25센트 동전을 넣어야 한다) 하는 식으로 비용을 낮추고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다진 소고기 등 일부 제품은 소포장이면서도 파운드당 가격이 코스트코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 마트인 H마트는 월~목 주중에만 간다. 학생증을 보여주면 5% 할인 혜택이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태생의 마트 체인인 해리스 티터는 조심해야 한다. 할인품목 가격은 확실히 저렴한데, 그 외 제품들은 월마트나 타겟보다 비싸다. ‘이번 주 할인 품목‘을 전단지에서 확인한 뒤 미끼상품만 사고 빠져야 한다.
너무 빡빡하게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종종 들지만 어쩌겠는가. 불필요한 외화 낭비를 줄이려면, 이역만리에서도 ‘아나바다‘를 실천하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