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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본 미국 고등학생들의 Speech and De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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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이른 아침. 텅 빈 교실에서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 4명이 토론을 시작했다. 모처럼의 새벽 단잠
을 설치고, 심지어는 아침식사까지 걸렀을 터. 하지만 학생들의 얼굴은 제법 비장하다.


“조만간 닥칠 북한의 붕괴를 고려하면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한 개입 정책을 강화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도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니요, 수많은 전문가들이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붕괴할 경우, 북한의 주민들은 물론
  미국의 우방인 한국도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역시 잠을 설치고 Judge(토론 평가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는 순간 잠이 확 깼다. 북한을 천형처럼
이고 사는 나의 처지를 알 리 없는 학생들의 입에선 전쟁이나 난민과 같은 살벌한 단어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의 토론 주제는 ‘중국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개입(engagement)를 강화해야 하나?’였다. 교실에
들어가기 직전 토론 주제를 확인하던 순간, 솔직히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웬만한 전문가도 감당
하기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평범한 학생들이 어떻게 토론을 이어갈 수 있을까? 더구나 학생들은 불과
30분 전에야 주제를 전달 받았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찬반 입장까지 지정된 상황. 애당초 깊이있는
토론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회의가 짙어지는 만큼 호기심도 커졌다.


내가 담당한 토론에서는 북한의 붕괴 가능성이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쪽에서 저명한 전문가의 인
터뷰 기사를 인용해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주장하자, 반대쪽에서는 북한 체제가 상당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반박에 나섰다. 그러나 급하게 인터넷을 뒤져 토론 자료
를 모았던 학생들의 밑천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어느새 토론은 자신들이 인용한 전문가들이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 얼마나 신뢰도가 높은지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런 논거마저 궁해지자 결국엔 누구의 인터뷰 기사가 좀더 최신의 것인지 비교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빚어졌다.


“Judge, 저희 팀이 제시한, 북한이 조만간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의 인터뷰는 불과 사흘 전에
  실린 것인 만큼, 더욱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가벼운 실소가 터졌다. 그러나 진지하기 그지없는 학생들의 표정에 서둘러 숨을 죽여야만
했다. 말 그대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은 1시간 반 가까이 이어졌다. 토론이 끝나는 순간, 학생들
은 곧바로 장난기 가득한 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몇 년은 더 입을 것 같은 헐렁한 정장 위에 알록
달록한 가방들을 걸친 뒤 우당탕 교실을 빠져나갔다. 뒤 따라 교실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머리가 복잡했다.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고요하고 평온한 캘리포니아의 주말
아침. 조금 전까지 어린 학생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스로 과민 반응이라고 자책도 해봤지만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미국 전역에서 열리는 speech and debate 토너먼트 일정표>



<한 Congress debate의 토론 주제 리스트>


말로만 듣던 미국 토론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던 건 조카 덕분이었다.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조카는 정식 과목의 하나인 ‘speech and debate‘을 수강하고 있고, 때문에 의무적으로 한 학기에
최소한 4번은 전국 단위의 토너먼트(tournament)에 참가해야 한다. 미국 전역에서 1년 내내 열리는
수많은 토너먼트들은 학부모에게도 고역이다. Judge로 토론에 참여해 채점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평일을 피해 주말에 열리는 토너먼트는 보통 오전 8시에 시작돼 오후 6~7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황금 같은 주말을 통째로 반납해야 한다. 빡빡한 진행 일정 때문에 점심 식사를 걸러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토론 주제들은 거의 대부분 첨예한 정치, 사회 현안들이다.‘최저 임금 인상’이나 ‘연방 정부의 가짜
뉴스(fake news) 규제’  ‘조세피난처 수익 이전 기업에 대한 법인세 혜택 폐지’ 등이 그나마 귀에
익숙한 것들이었고, ‘연방 정부의 동일 학습 기준(common core standard) 폐지’와 같이 완전히 생경
한 주제들도 적지 않았다. 예민한 외교 정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에 대한 개입 강화’나 ‘이스
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처럼 지금 워싱턴 정가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들이 줄줄
이 도마에 올랐다. 이런 주제들을 확인할 때마다 ‘the greatest country’로 자부하는 제국에 와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권고하는 가상의 결의안>


토론 형식에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길게는 한 달의 준비 기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학교
수업을 소화해야 하는 처지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긴 어렵다. 설령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들, 복잡
하게 얽히고 설킨 토론 주제들의 맥락과 그 무게를 충분히 이해할지도 미지수이다. 토론 평가의 주안
점도 내용 자체보다는 전반적인 자세나 논리적인 전개, 연설 기술 등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그럴까, 어느 교실에서나 기성 정치인을 뺨치는 화려한 언변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누구 하나 빠짐없이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유지하며 다른 학생들의 연설을
경청한다.
  
뜻하지 않게 직접 체험한 미국 토론 교육의 현장은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시의적절성을
앞세운 토론 주제들의 과잉(!)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감을 지울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이 빠진,
‘토론을 위한 토론’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우려 너머, 자유
롭고 개방적인 토론을 통해 세계 시민을 길러내려는 교육 문화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여기
까지 생각이 미치면 다시금 태평양 건너 한국을 바라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