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며칠간 캐나다에 다녀왔습니다. 캐나다 여행 도중 혹시 미국으로 전화를 걸거나 전화가 걸려올 경우에 대비, 로밍 관련 문의를 하기 위해 제가 가입한 미국 통신사인 버라이즌(Verizon) 고객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원하는 서비스를 고르기 위해 수차례의 버튼을 누른 뒤, 상담 고객이 많아 기다리라는 음성 서비스를 수십차례 반복해 들어야 했습니다. 장장 30분 가량이 흘렀을까. `천신만고‘ 끝에 연결된 상담원으로부터 돌아온 답은 “별도의 서비스 신청 없이 그냥 다녀오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외마디였습니다. 단기간 여행이기 때문에 별도의 가격 플랜을 신청하면 부담액이 더 늘어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수십 분 동안 전화통을 붙잡다 허탈하게 전화를 끊으니 미국에 온지 얼마 안돼 겪었던 휴대폰과 관련된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미국 연수에 앞서 한국에서 미리 준비했던 것 중 하나가 미국에서 쓸 휴대폰을 미리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구입해도 되지만 잠시라도 휴대폰 없이 지내는 것이란 상상할 수 없었던 한국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공항에서부터 바로 터지도록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강남 역에 있는, 버라이즌 지점에서 휴대폰을 샀습니다. 미국에서 쓸 아이패드를 이미 구입했던 터라 스마트폰 대신 가격이 저렴한 일반폰을 골랐습니다. 참고로 버라이즌의 경우 휴대폰 사용 약정이 의무적으로 2년으로 돼 있기 때문에 저 같이 1년 머물고 한국에 돌아오는 경우 위약금 조항(스마트폰의 경우 위약금이 일반폰에 비해 두 배 정도 됩니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편하게 휴대폰을 쓸 수 있다는 잇점 때문에 이를 감수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 오니 굳이 서둘러 한국에서 휴대폰을 살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엄습하더군요. 몇분이 멀다하고 문자니 전화니 걸려오던 한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낯선 사람들로 가득찬 이 곳에서는 저를 찾는 이가 가물에 콩 나듯 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죠. (버라이즌이 가장 지국이 많아서 잘 터지고, 임대폰의 경우 통화품질이 안 좋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지내보니 미국에 온 뒤 휴대폰을 구입하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휴대폰이 걸려오지 않는 생활에 제 스스로 적응이 안되기 까지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휴대폰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지만 막상 전화가 하루에 한두번 걸려올까 말까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알람이 울리기만 해도 반가운 지경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 휴대폰에 얘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지 몇 주가 지났을까, 한국마트에서 물건을 잔뜩 구입한 뒤 – 당시 차를 구입하기 전이었습니다 – 10개에 가까운 비닐봉다리를 두 손에 나눠 들고 초인적 힘으로 지하철 역을 향해 하염없이 걷고 있던 중,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잠시 지나가는 소낙비려니 하고 그냥 걸었지만, 웬걸, 하늘에 구멍이 뚫린듯 비는 무섭게 계속 쏟아졌습니다.-그다음날 지역 뉴스를 보니 그날 갑작스런 폭우로 어린아이 두 명이 떠밀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길거리에는 우산을 쓴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하나도 없었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길에 가게 하나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계속 걸어야 했고, 그 사이 온 몸이 흥건이 젖고 말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집에 도착한 순간, 무심코 호주머니에서 꺼내든 휴대폰은 먹통이 돼 있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처럼 휴대폰 서비스센터가 활성화돼 있지도 않은 상태여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집 근처에 있는 버라이즌 대리점-직원이 하나 뿐인 조그만 곳이었습니다-으로 달려갔지만, 점원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Put it into a Rice Bag!” 이었습니다.
갑자기 휴대폰을 왜 쌀자루에 넣으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저에게 그 점원은 쌀자루에 넣으면 쌀톨들이 휴대폰의 물기를 흡수하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은 휴대폰이 물에 젖으면 보통 밤새 휴대폰을 쌀자루에 넣는다는 설명을 했습니다.(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휴대폰 물에 젖었을 때 대처법‘에 실제로 쌀자루에 넣으라는 것도 있더군요)
“If it doesn’t work, you should buy a new one. No other way”
반신반의 했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쌀자루에 휴대폰을 넣어 꼬박 하룻밤을 재웠습니다.
그다음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가슴을 졸이며 쌀자루에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여전히 휴대폰은 먹통이었습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했던가요. 미국에 와서 좀처럼 휴대폰 쓸 일이 없었던 건만, 하필이면 휴대폰이 그렇게 망가진 그 주말 이런저런 약속을 해놓은 터라 전화가 올 일들이 몇 건 생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대폰이 없던 잠깐 동안 이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친구와 Washington D.C안에 있는 조지타운 핏자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했습니다.(휴대폰이 없는 관계로 아이패드 카카오톡으로..) 약속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갔지만 친구는 없었고, 아이패드도 밖에선 무선통신이 되지 않아 연결불가 상태였기 때문에 연락할 길이 없었습니다.(미국에서도 한국처럼 이제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장소를 혹시 혼동한건가?’, `시간을 잘못 안건가?’ 여러가지 생각들로 머리속이 복잡해졌지만 연락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막막하게 몇 십분간 서성이다 만남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건널목을 건너는 순간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번은 누군가와 지하철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 했다가 엉겹결에 잘못된 지하철 호선을 탄 뒤 그것도 모르고 지하철 안에서 잠들었다가 뒤늦게 깨보니 엉뚱한 역에 도착해 약속을 펑크 낸 적도 있었고, 시계까지 고장난 터에 휴대폰까지 없다 보니 시간을 알 길이 없어 약속을 해놓고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 몰라 중간에 시간을 때우면서 얼마간의 간격마다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 시간을 묻고 나오는 웃지 못할 촌극도 연출해야 했습니다.
디행히 며칠 후 규모가 큰 버라이즌 대리점에 갔더니 개런티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중고폰으로 무료로 바꿔줬지만, 이 역시 바로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우편으로 받도록 돼 있어 며칠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며칠동안은 여전히 휴대폰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처음에 들렀던 버라이즌 대리점 직원이 영어가 서툰 외국인에게 휴대폰을 새로 팔아먹기 위해 개런티 기간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규정을 몰랐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휴대폰에 관한 한 미국 시스템이 훨씬 불편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비단 휴대폰 뿐 아니라 한국 처럼 서비스 면에서 `빨리빨리’가 통하는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쇼핑몰에 휴대폰 수리점이 있는 경우가 있고, 더러 길가에 휴대폰 수리점이 별도로 있기도 했지만 절차도 훨씬 복잡하고 비용도 한국보다 훨씬 많이 든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우여곡절의 며칠이 흐른뒤 휴대폰이 다시 제 손에 들어온 뒤로, 여전히 제 휴대폰이 울릴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만…^^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한국처럼 `빨리빨리‘인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휴대폰 침수 해프닝을 겪은 뒤 한번은 화장실 변기가 막혔는데 아파트 관리소와 렌트 주인 모두 서로 소관이 아니라며 `핑퐁게임’을 했던데다, 우여곡절 끝에 기술자를 부른 뒤에도 기술자가 한참 뒤에나 나타났고, 거기다 필요한 기구를 가져오지 않았다며 두 번이나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습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서비스도 너무 세분화돼 여러 사람이 나눠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한국에서는 `원스톱‘으로 될 것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혹자는 그래야 일자리 창출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하더랍니다만.. TV나 여권, 항공 관련 등 서비스 전화 서비스에서 최소 30분 가량 대기하는 것도 다반사입니다.
한국에서 너무 당연히 여겨졌던 일상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좌충우돌의 순간들이었습니다. #
* 연합뉴스 송수경 기자는 미국 워싱턴D.C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연수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