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O’ 사이에 억류된 악몽 같은 일주일
기사로만 읽었던 ‘자금동결’이 이렇게 무서운 건가? 미국에 와서야 알게 됐다. 불량국가나 테러단체 따위나 당하던 걸로 알았던 자금동결, 그것과 유사한 상황을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그것도 방문학자 신분으로 겪었다. 미국 은행에 돈이 묶인 탈레반이 왜 그렇게 발악하는지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8월 초 미국에 들어왔다. 초반 정착은 순조로웠다. 미국 은행 계좌 개설, 신용카드 신청, 연수대학 등록, 운전면허 합격 등을 4일 만에 완료했다. 정착 서비스도 이용하지 않고 스스로 해낸 것이었다. “정착 과정도 연수 생활의 일부”라며 부린 호기가 통했구나 생각했다. 정착이 일찍 끝났으니, 아이들 학교 개학 전까지 긴 여행도 다녀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미국과 나는 코드가 맞는구나!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미국에서 탈 자동차 대금을 치르기 위해 한국 계좌에서 8월 11일에 보낸 돈이 일주일 동안이나 미국 계좌로 들어오지 않은 사고가 터진 것이다. 자동차 대금은 한국의 **은행 계좌에서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 계좌로 송금받은 뒤, 수표(cashier check)로 처리할 계획이었다. 이미 같은 방식으로 한 차례 생활자금을 보낸 적이 있었고, 당시엔 만 하루도 되지 않아 송금액이 미국 계좌로 안전하게 입금됐다. 자동차 계약금을 걸고 잔금을 치르기 전날 밤에도 한국 업무시간에 맞춰 **은행 계좌에서 뱅크오브아메리카 계좌로 송금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BOA 계좌를 열어봤다. 어라? 미국 계좌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전엔 바로 송금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었다. **은행 앱을 열어 송금추적서비스를 이용해봤다. ‘해외로 전문발송 완료’라고 떴다. 송금액뿐 아니라 송금 수수료까지 모두 ‘정상적으로’ 빠져나간 상태였다. BOA에 문의해봤다. 수많은 연수생들을 겪어온 한국계 직원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으니 좀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면의 밤을 보낸 이튿날, 퀭한 얼굴로 다시 BOA 앱을 열었다. 한국에서 빠져나간 돈은 이날도 미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돈은 어디로 갔는가? 배를 타고 오는 화물도 아닌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걸리는 것일까? BOA에 다시 전화했지만, 마침 한국계 직원은 휴가를 가고 없었다.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송금이 묶인 복잡한 상황을 영어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차를 계약한 딜러는 왜 잔금을 치르러 오지 않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정점에 달했다. 아이들은 아빠의 흰머리가 갑자기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의 **은행 앱상으로는 몇 번이나 확인해도 송금 과정이 완료됐다고 떴다. 그런데 송금받은 미국 계좌엔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동안 꺼놓고 있었던 한국 휴대폰을 켜봤다. 밀려있던 문자 메시지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와중에 ** 은행에서 보낸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고객님께서 신청하신 해외송금 관련 정보수정 요청이 도착했으며~” 문자를 보자마자 **은행으로 국제 전화를 걸었지만, 한국은 이미 금요일 밤이었다.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 광복절 대체 연휴인 월요일까지 긴 휴가가 시작된 것이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급했던지 일반 전화 번호로 온 문자 메시지에 “해외송금 신속한 처리 바랍니다”라고 답장을 보내보기도 했다. 답이 올 리가 없었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일반 전화로 문자 메시지 답변을 보내기도 했다.
해당 은행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진 끝에 해외사고 전담 번호를 찾아 국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 답답하시겠지만 저희는 보이스피싱 등 긴급한 사고 전화만 받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은 심야 시간이어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친절한 응대였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은행에서 빠져나간 돈이 미국으로 오지 않았는데 이건 사고가 아닌가요?” 항의하자, 상급자에게 보고해보겠다고 했다. 하루가 지났을까? 상급 직원은 미국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주었다. “저희가 창구 직원을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고객님이 계좌번호에서 숫자 하나를 잘못 입력하신 거 같다고 하는데요?” “네? 그럴 리가요? 잘못 입력했는데 돈이 빠져나가나요?”
‘0’과 ‘O’의 차이를 아시겠는가? 앞은 아라비아 숫자 0이고, 뒤는 알파벳 대문자 O이다. 기자는 BOA 계좌번호를 입력하면서 숫자 0을 넣을 자리에 알파벳 대문자 O을 넣는 대형 사고를 쳤다.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휴대폰 자판을 찾아봤다. 아라비아 숫자 0과 알파벳 문자 O이 한 지붕 식구처럼 위아래로 나란히 붙어있었다. 결국 내 실수였다. 0이 들어갈 자리에 O가 들어가 있자, 뱅크오브아메리카는 계좌번호가 이상하다며 한국의 **은행에 문의를 걸었던 것이다. **은행이 확인차 내게 건 한국 전화는 꺼진 상태였고, 은행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했을 땐 한국은 이미 광복절 황금연휴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한국의 황금연휴가 기자에겐 악몽과도 같은 3일이었다.
대체연휴였던 8월 16일(월요일)이 지나고 17일 화요일 은행 영업시간이 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하루가 지난 18일에야 미국 계좌로 돈이 들어왔다.
애초 계좌번호를 잘못 누른 것은 기자의 명백한 실수다. 하지만 아직도 은행 측의 외환 업무에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다. 우선 계좌번호를 잘못 입력했는데도 어떻게 돈이 빠져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은행 측은 외환의 경우, 고객이 요청한 계좌번호를 그대로 해외 은행에 전달할 뿐이며, 해외 은행의 경우 계좌번호에 알파벳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의 대형 은행이 미국의 대형 은행으로 돈을 보내면서 고객의 이런 기본적인 실수조차도 스크린해주지 않는 것도, 송금이 완료되지 않았는데도 수수료까지 떼가는 것도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송금 절차를 온라인 앱으로 진행했는데, 은행 앱상으로는 외환 송금 사고가 전혀 고지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은행 앱상으로 해외송금추적서비스를 이용해보면 지금도 “해외로 전문발송 완료”라고 떠 있다.
이번 사고를 겪으면서 송금과 관련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해봤다. 우선 정착 초기 자금은 환율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미리 넉넉히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 정착 초기에는 자동차 구매와 살림살이 구입, 각종 디파짓 등 씀씀이가 크다. 자동차만 해도 보통 2만불이 넘어간다. 그래서 환율 추이를 보면서 생활자금을 나눠서 보내겠다는 게 내 생각이었지만, 환율이 하루 이틀 사이에 급등락하진 않았다. 미리미리 달러를 바꿔두고 입국할 때 최대한 많이 가져오거나, 미국에서 계좌를 연 뒤 초기 자금을 넉넉히 보내는 게 정착 스트레스를 줄이는 길이다. 기자가 미국에 입국한 이후 두달여 만에 환율이 달러 당 40원 가까이 올랐다. 결과적으로 정착 초기에 최대한 많은 달러를 송금해놓는 게 비용도 절약하고 송금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었던 길이었던 셈이다.
정착 초기엔 미국에서 개통한 휴대전화 외에도 한국번호로 된 휴대전화도 주기적으로 열어보고 확인하는 게 좋다. 미국 정착 뒤에도 한국 휴대전화 번호로 아이들 학교나 은행, 동사무소, 아파트 관리 사무소 등에서 연락이 종종 온다. 긴급하지 않은 사안들이 대부분이지만, 기자처럼 은행에서 중요한 송금 관련 문자가 오기도 한다. 한국 번호 휴대전화를 아예 꺼놓고 지내면 이런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휴대전화 한 대만 유지하면서 유심칩만 미국 번호로 갈아 끼운 경우라면, 주기적으로 한국 유심칩을 꽂아서 한국에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게 좋다.
또 미국에서 은행 계좌를 개설할 때는, 한국계 직원이 있는 은행지점을 이용하는 것이 돌발 사고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