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우 연수 일정이 확정되고 나서 연수를 준비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앞서 연수생활을 했던 선배들의 연수기였다. 외국에서 생활하고 돌아온 연수생들을 직접 만나 경험담을 듣는 것도 좋지만 바쁜 시간에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어려웠고 또 단편적인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는 있어도 체계적인 안내를 받기는 무리였다. 다행히 그 공백을 메워준 것이 연수기였다.
나와 와이프는 연수 출발 전까지 여러 사람들이 쓴 연수기를 꼼꼼히 읽으면서 필요한 부분은 메모를 하고 그 지침에 따라 미국에서 부딪칠 문제점에 대한 대책을 준비했다. 그 결과 연수기에서 얻은 정보가 미국생활에서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됐고 이를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연수생들간에도 정착지역이나 선택한 학교와 전공, 연령별로 조금씩 겪는 경험에 차이가 있지만, 큰 흐름은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한다. 미세한 차이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감안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연수기를 작성한 때는 내가 미국에서 한 학기 일정을 마무리하고 절반의 반환점을 돌려는 시점이다. 처음 미국 땅에 정착할 때는 모든 게 낯설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동안 몸으로 부딪친 경험이 나도 내 이야기를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어주었다.
연수기는 1.미국 도착기 2.좋은 아빠되기 3.현지 적응하기 4.여가시간 활용 5.여행 팁 6.영어 배우기 7.교육 문제 8.미국문화의 이해 순으로 작성해 보았다.
1.미국 도착기
2005년 8월1일 서울을 떠나는 날이다. 아침부터 마음은 분주하고 무엇을 마무리해야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이제 남편이자 아빠로서, 가족들로부터 가장의 능력을 평가받는 심판대에 오른 셈이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부터는 와이프의 잔소리가 부쩍 심해졌다. 예약항공편은 차질이 없느냐, 현지 도착해 차편은 어떻게 되느냐, 입주할 아파트 열쇠는 어떻게 픽업하느냐…한가지씩 생각날 때마다 툭툭 질문을 던진다. 앞서 재단의 연수기 중에서 고생담을 적어놓은 것을 보아서인지 물설고 낯설은 미국에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할지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낯선 미지에서의 생활이 걱정되기 때문임을 왜 모를까마는 나름대로 현지에서 가장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남편도 부단히 노력해온 터인데… 내 나름대로 부단히 미국과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전하게 입주할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출발일 아침 우선 항공편의 출발여부를 전화로 체크했다. 때는 마침 아시아나 항공사의 조종사 파업이 2주일째 계속되는 때여서 국내선은 다수가, 국제선은 일부가 펑크나곤 했다. 나도 며칠전부터 예약항공편이 펑크나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확인 결과 내 예약편은 차질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다음은 7개 분량의 항공 소지물(이민가방 6개, 여행가방 1개)을 운반하는게 큰 과제였다. 나는 짐을 줄이자고 주장했지만 와이프는 가져가야할 품목들이 많다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씩 담았다. 그 통에 우리가족이 탁송할 수 있는 짐보따리수 8개(1인당 2개)에서 1개가 모자라는 7개가 준비됐다. 나는 우선 집에서 가까운 강남 센트럴시티내 공항터미널에서 짐을 부치기로 계획을 세웠다. 미리 짐을 탁송하면 인천공항까지 홀가분하게 몸만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센트럴시티 공항터미널에는 KAL 라운지는 없고 아시아나항공 라운지만 있다. 개당 27~29㎏에 달하는 가방 7개를 한꺼번에 옮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SUV에 짐칸부터 좌석까지 빽빽이 채워넣으니 한번에 운반이 가능해졌다. 두 번은 운반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일이 한번에 끝날 수 있어 훨씬 수월해졌다.
짐을 부치고 나니 비행기 탑승시에는 노트북 컴퓨터 한대와 여권, 수첩 등을 담은 작은 소지품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우리 가족은 공항버스를 이용해 인천공항에 간 뒤 곧바로 출국장을 통과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항공기는 논스톱으로 시카고 오헤어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은 여기서 탁송한 짐을 찾아 아메리칸 에어라인으로 갈아타고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램버트공항까지 갈 예정이었다. 비행기가 시카고에 가까워지면서 내심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일이 걱정이 됐다. 출발전 들려온 얘기로는 며칠전 노스캐롤라이나주로 출발한 다른 회사 기자 일행이 죠지아주 아틀란타공항에서 검색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지체되는 바람에 2시간의 환승시간을 넘겨 하루 밤을 공항 근처 호텔에서 묵은 뒤 다음날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가방 가득 채워간 음식물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농수산물 반입을 엄격히 규제하는 미국에서 깐깐한 세관원을 만난 바람에 이민가방을 전부 열어젖히고 식품을 하나 하나 설명한 뒤 일부는 압수 당하고 실랑이를 하다 환승시간을 넘겼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우리가 준비한 여행가방에서 포장되지 않은 식품은 전부 제외시키기로 작정했다. 흔히 미국갈 때 소지하는 간장, 고추장, 된장 등 양념류와 멸치, 김, 미역 등 건어물 중에서도 공장도 포장되지 않았거나 포장을 훼손한 것은 다 제외시켰다. 이 바람에 부모님이 미국에 가는 자식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준 일부 양념류와 미숫가루, 젓갈, 멸치 등은 눈물을 머금고 짐 보따리에서 빼냈다.
비행기 안에서 작성하도록 나눠준 세관신고서(Customs Declaration Form)에도 보석류, 현금, 음식물 등 각종 항목을 기입하도록 되어있었다. 나는 음식물 소지 여부를 묻는 항목에 체크를 하면서 내심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 시카고 공항은 의외로 세관 검색에 지체현상은 없었다. 내 차례가 되어 세관원에게 미리 작성한 세관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신고서의 음식물 항목에 체크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어떤 종류의 음식물을 가져왔냐고 질문했다. 나는 미리 준비한 답변대로 “미국생활에 필요한 음식물을 가져왔다. 다만 그것들은 모두 공장에서 생산된 규격품이다”고 답변했다. 세관원은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턱짓으로 ‘통과해도 좋다’는 표시를 했다. 그의 손을 감싸쥐고 “I appreciate you”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행기가 무사히 세인트루이스 램버트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미국 국내선이기 때문에 세관 검색대를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공항 출국장 입구에서 연수기관에서 보내준 박사과정 학생과 우리 가족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다른 연수생 가족을 만나는 순간 무사히 도착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박사과정 학생은 두 가족과 짐을 싣고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의 콜롬비아시까지 인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여행객의 짐가방을 토해내던 공항 컨베이어벨트가 갑자기 멈춰섰다. 의아하게 생각할 즈음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주위가 소란스러워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내 이름 비슷하게 부르는 듯 했다. “Mr. 병~리 ~” 설마 공항직원이 나를 찾을 리가 있을까 생각하며 그냥 넘겼다. 그랬더니 몇분 뒤 한 직원이 안내판에 내 이름을 적어서 여행객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내가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라고 하자 직원들이 사무실로 나를 데려갔다. 사연인즉 내 짐가방 하나에서 기름이 새고있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공항직원들이 폭발물 탐지기, 마약 탐지견 등을 동원해 내 가방을 조사하고 있다면서 가방 속에 무엇이 들었냐, 혹 폭발할 물건을 넣고 있느냐, 왜 기름을 소지했느냐 등을 질문했다. 나도 왜 기름이 있는지 감이 안잡히는데 와이프가 ‘참기름’이라고 귀뜸했다. 직원들에게 “아마 양념류(seasoning), 참기름(sesame oil)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잠시 후 깡통에 든 참기름의 마개부분이 떨어져나가 참기름이 완전히 샌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나는 미국인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컨베이어벨트가 한참 중단돼 많은 사람의 귀중한 시간이 허비됐는데도 불구하고 공항직원들에게 불평하거나 항의함이 없이 묵묵히 기다리는 자세, 그런 인내심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궁금했다.
미리 서울에서 구해둔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을 훨씬 넘긴 현지시간 새벽1시. 짐도 이곳에서 생활하던 한국인 연수생으로부터 넘겨받은 터라 첫날을 침대에서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많은 연수생들이 도착해서 숙소와 짐 때문에 며칠씩 호텔 신세를 지거나 맨바닥에서 고생했다는 후일담을 연수기에서 보고 분주히 준비한 덕분에 미국 도착에서만은 가장의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