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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좋은아빠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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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좋은 아빠’ 되기

미국에 오기 전에 와이프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나는 미국 가면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할테니 당신이 다 알아서 하라”
이 말에 나는 가타부타 답변을 안하고 웃음으로 넘겼지만 내심 “미국 가면 내가 한번 해보지”하고 다짐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내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기자생활이 비슷하지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밖에서 생활하고 술에 취해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가족과는 주말에 겨우 얼굴보고 대화를 가질 정도였고 그나마도 주말에 골프약속 등으로 혼자 외출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연수과정 동안 가족들에게 사죄하는 뜻에서 철저히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철저히 가족과 함께 하는 생활이다. 처음 미국에 도착해 와이프는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한달을 넘기지 못했다. 하루 24시간 중 학교에서 보내는 오전 나절을 제외하고 많은 시간을 와이프와 함께 보내기 때문이다. 우리 경우는 아침일찍 아이들을 학교까지 자동차로 태워주면 부부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오전8시 즈음해 부부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학교로 간다. 나는 강의를 듣고 와이프는 그 시간에 콜롬비아시에서 운영하는 ESL 코스를 들으러간다. 런치박스를 두개 준비해 차로 함께 외출한 뒤 내가 먼저 내리고 와이프가 차를 몰고 ESL 강의장에 가는 식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함께 만나 대학에서 식사를 하고 오후에 한 강의를 더 듣는다. 그리고 오후 2시쯤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온다.

항상 챗바퀴같은 일상 스케쥴이지만 처음 겪어보는 이런 생활이 즐겁다. 하지만 하루 세끼를 함께 식사를 하니 와이프 입장에서는 식사 준비가 항상 고민거리인 것 같다. 한달쯤 지나자 와이프는 “쌀이 너무 많이 소비된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시작했다. 서울생활에서는 20㎏들이 쌀 한 부대를 구입하면 몇 달을 소모했는데 미국에서는 한달에 한 부대가 부족하니…4인 가족이 하루 세끼를 집에서 식사를 하니 쌀 소비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점심급식을 하지만 집에 귀가하면 항상 배가 고프다고 다시 챙겨먹는다. 학교에서 주는 미국식 점심급식이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남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 돈 관리부터 자질구레한 우편물 챙기기, 집안 손질까지 모두 남편의 몫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직도 우편물의 유통량이 굉장히 많은 나라중의 하나이다. 2~3일만 우편함을 점검하지 않으면 우편물이 수북이 쌓인다. 미국에 도착한 초창기에 우편물을 잘 챙겨야 실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우편물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우편물을 담당하다보니 시간소모와 귀찮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각종 회사의 flier(광고전단)부터 각종 유틸리티비용 청구서, 아이들 학교에서 보내는 소식지 등 많은 우편물을 일일이 점검하고 필요한 사안에 대해 뒤처리를 하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정착 초기에는 우편물 겉봉에 “important nformation”이라고 빨간 문구를 보고 놀라서 꼼꼼히 읽어내려갔다가 끝내 광고전단임을 확인하고 허탈해 한 일이 몇차례나 있었다. 한동안은 옆에 사전을 준비해두고 우편물의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점검하느라 더 시간소모가 많았다.

한국에서 남편들은 왠만하면 집안설비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집에서 못 한번 박아본 적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남편들은 다르다. 각 집마다 딸려있는 garage(차고)를 작업장이자 설비창고라고 보면 된다. houseware나 tools을 취급하는 Lowe나 Home Depot 같은 곳을 가보면 과연 일반 가정에서 이런 것들을 구입할까 싶은 공구들이 널려있다. 국내에서는 전문 설비업자들도 소지하지 않고있을 법한 공구나 장비들이다. 만약 화장실이나 집안인테리어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설비업자를 찾지만 미국의 남편들은 직접 팔을 걷어부친다.

나도 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적지않게 이런 문제점에 부딪쳤다. 화장실 변기에서 물이 샌다거나, 유리창 블라인드를 함부로 다루다 망가트리거나, 문틈의 고무패킹이 달아서 바람이 스며들어 온다거나… 나도 서울에서는 한국 남편이었지만 미국에 도착한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일일이 해당 설비업자를 부르면 돈도 돈이거니와 마땅히 사람을 찾기도 쉽지않은 일이다. 미국에 처음 도착한 뒤 와이프가 내뱉은 첫 푸념이 욕실의 샤워기가 한국과 달리 벽면 고정형이어서 샤워할 때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호스식 샤워기여서 손으로 잡기도 하고 벽면에 고정시키기도 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미국은 대부분 벽면 고정형이다. 이것은 호텔 등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나도 이것이 불편해서 대형 할인점에 가서 적당한 가격의 호스식 샤워기를 구입했다. 물론 고정식 샤워기의 해체부터 패킹, 호스식 샤워기 설치까지를 내 손으로 완수했다. 그밖에도 생활하면서 앞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일이 하나씩 생길때마다 전부 내 손으로 직접 해결했다. 물론 미국은 국내와 달리 각종 설비와 자재들이 전부 구비되어있어서 약간의 주의력과 인내심을 갖고 노력하면 가능하게 되어있다.

이곳에서 알게된 한 미국인은 3년째 집을 건축 중이라고 한다. 대학교수인 그는 자신이 직접 자신의 집을 짓고있었다. 평일에는 많은 시간을 내기 어려우므로 주로 주말이나 휴가시즌을 이용해 건축작업을 진행시키기 때문에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었다. 물론 아주 전문적인 일부 작업에는 노동력을 사지만 대부분의 작업을 그가 수행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한국에서 자기 집을 손수 짓는다는게 가능할 법한 일인가? 미국남편들은 가구도 상당수 직접 제작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몇 대째 선임 연수자들로부터 내려온 짐이어서 언제 어떻게 내게까지 흘러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집에도 아마추어 남편이 제작한 것처럼 보이는 사이드테이블과 간이의자가 존재한다.
자동차의 경우에도 왠만한 것은 월마트나 전문 자동차부품 할인점에서 사다가 손수 해결하는 미국인들이 많다. 내 경우도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구교체, 밧데리 정비 등의 작업을 손수 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인테리어 공사를 많이 한다. 최근에는 자재비와 인건비가 많이 올라 평당 100만원씩 지불해도 훌륭한 공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거의 인테리어 공사는 스스로 해결한다. 미국 TV나 영화를 보면 남편과 부인이 서로 집안 페인트칠을 하고 바닥공사를 하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것이 평균적인 미국인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국에서 한국사람들끼리의 모임은 거의 부부동반 혹은 가족동반 형태다. Thanks Giving Holiday, Christmas Party, 종강 파티, 귀국 연수생 환송모임 등과 같은 것이 한국에서온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공식모임이다. 서울에서라면 남편들끼리 만나는 경우가 많겠지만 미국에서는 모두 부부참석이거나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모임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한국과 달리 남편들이 술로 교제를 나누는 경우가 드물다. 간단하게 맥주 한 두 잔이거나 와인으로 반주를 대신한다. 고국에서 많은 시간 친구들과 혹은 직장동료들과 모임이라며 술에 취해 귀가하는 모습에 익숙해있던 와이프가 미국 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는 모습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한국에서 연수를 떠나기 직전에 먼저 연수생활을 마친 몇몇 분들로부터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부부간에 갈등이 많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미국생활을 겪어보기 전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미국생활을 하면서 그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보는 원인은 두가지다. 첫 번째는 고국에서는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적었는데 미국에서는 부부가 하루종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갈등의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에서와 미국에서 남편들의 역할이 달라져야하는데 남편들이 고국에서 하던 생활습관을 유지하려하기 때문에 부부간에 갈등이 많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남편들이 연수시간을 모처럼 가족을 위해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는 기회로 삼겠다고 생각하고 출발한다면 부부간 혹은 가족간 갈등은 적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몇몇 연수생들과 얘기를 나누다 우리 스스로에게 하우스허즈번드(Househusband)라는 조어를 만들어 붙였다. 미국인에게 우리의 신분이 Househusband라고 설명하자 재밌는 단어라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한국 남편들은 미국에서만은 Housewife의 역할을 상당부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