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오후 4시에 모리스빌에 들어온대요.”
“캐리는 오후 2시에 풀렸는데, 30분 만에 품절됐어요.”
“채플힐은 오후 6시에 입고된다고 들었어요. 갯수 제한도 없어요.”
미국 슈퍼마켓 체인인 트레이더 조가 부활절 시즌을 맞아 출시한 미니 캔버스 토트백을 두고 노스캐롤라이나 지인들과 단톡방에서 나눈 대화입니다.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긴박감 넘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단돈 2.99달러(약 4300원) 짜리 가방을 사기 위해 나눈 대화입니다.
트레이더 조는 지난 9일 미국 전국 매장에 이 가방 4가지 파스텔 색상(하늘, 분홍, 보라, 민트)을 출시했는데, 이 가방을 사기 위한 경쟁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소셜미디어에는 이 가방을 사려고 매장 앞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여럿 올라왔습니다. 로스앤젤레스(LA) 매장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에는 새벽녘 캠핑용 의자 등을 챙겨온 사람들이 보입니다.
LA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와 비교할 수 없지만,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이 가방을 사려는 인파로 매장이 북적였습니다. 캔버스 재질의 이 손가방은 작년 3월 빨강, 노랑, 초록, 파랑 쨍한 색상으로 처음 출시됐습니다. 출시 당시 틱톡, 엑스(옛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SNS)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 매장에서 품절 대란을 불렀습니다. 이 가방은 작년 가을쯤 재입고됐는데, 그 때도 금새 동이 났습니다. 미국의 커뮤니티 사이트인 래딧에는 이 가방에 대한 토론방이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작년에는 이 가방의 가치(?)를 모르고 무심하게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동생으로부터 “트조(트레이더 조) 가방 샀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가방을 찾아다녔지만, 있을 리가 없죠. 그러다 올해 2월 쯤 매장 직원을 자처하는 사람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 가방이 파스텔 색상으로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갈 때 사 갈 선물로 적당해 보이는군. 이번에는 사고야 말겠어.’ 이렇게 구매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그림 2 지난 11일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트레이더 조 매장에 미니 캔버스 토트백이 진열돼 있다. 이 매장에는 9일부터 11일까지 총 3차례 가방이 입고됐는데, 입고 시작 후 30분만에 모든 물건이 동났다.
식료품을 사러 트레이더 조 매장에 갈 때마다 점원에게 이 가방이 언제부터 판매되는지 물어봤죠. 물론 직원들은 속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습니다. 2월에 나온다는 직원이 있었고, 3월부터 매장으로 매일 전화해보라는 황당한 조언을 하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매장에서 만난 미국인 주부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트레이더 조는 명절 때마다 특별 아이템을 출시하니까, 부활절인 4월에 가방을 출시할 거야”
4월 첫째주 출시가 기정 사실화 됐지만, 직원들은 매장에 입고되는 시간도 잘 말해주지 않습니다. 트레이더 조 매장 직원들의 밀당(밀고당기기)은 혀를 내두릅니다. 가방 입고 시점을 묻는 전화에 “10일 오후 2시”라고 답했더니, 매장에 가니 “정확히는 우리도 모른다”고 한발 물러섭니다. 매장에는 배달되지도 않은 가방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요.
저는 오후 2시쯤 도착해서 1시간 가량 기다리다 허탕을 치고 매장을 빠져 나왔는데,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가방은 오후 6시에 입고됐다고 합니다. 직원 말을 믿은 사람들은 4시간 넘게 매장을 배회하며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서 샀겠죠.
트레이드 조는 아마 매년 새로운 가방을 내겠죠. 그 때마다 구매 광풍이 불 지는 모르지만, 이 지역으로 오실 분들에게 ‘구매 꿀팁’을 남기려 합니다. 먼저 채플힐과 랄리에는 5곳의 트레이더 조 매장이 있습니다. 매장 별로 토트백 판매 정책이 다릅니다. 모리스빌에서는 가구당 구매할 수 있는 가방을 4개, 캐리는 8개로 제한했는데, 랄리는 한 사람 당 8개 살 수 있었고, 채플힐은 아예 판매 제한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정한 기준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추측컨데 아시아 인구 비율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역 인구 통계를 보면 모리스빌은 아시아 인구 비율이 46%로 제일 높고, 캐리 20.4%, 채플힐 13.2%, 랄리는 7.3% 입니다. 가방 행렬에 동참하면서 아시안 혐오가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도 됐습니다. 채플힐 매장에서 이 가방 수십개를 카트 한가득 싣고 결제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모두 아시안이었거든요.
미국에서는 이 가방을 사서 되파는 이른바 ‘리셀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가방 4개를 사는 저에게 “직접 쓸거냐”고 묻는 매장 직원도 있었습니다. 이 가방을 되팔거냐고 묻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이 가방의 가장 큰 경쟁력은 가격입니다. 한 개당 2.99달러(약 4300원)로 소비세를 더해도 한국 돈으로 5000원이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방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구매에 성공한 일부 소비자들은 수백 배 웃돈을 붙여 재판매에 나섰습니다. 가방은 이베이 등 온라인 거래 사이트에서 4개 세트에 200달러(약 29만원)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인기가 많은 분홍색은 개당 1000달러(약 140만원)에 올린 판매업자도 있습니다.
LA나 뉴욕에서는 이 가방을 한 개 30달러(약 4만 3000원)에 샀다는 후기가 수두룩합니다. 저도 30분 거리의 매장을 순회하며 가방을 사들였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기념품용 가방을 샀다는 뿌듯함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한 마음도 듭니다. 실제로 얼마 전 가방 구매 행렬에 동참했던 사람들을 만나 저녁을 먹었는데,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가방, 이게 도대체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