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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광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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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광란’ 속으로.

‘3월의 광란(March Madness)’을 들어보셨나요? 매년 3월 미국 대학 중 68개 팀이 경쟁하는 토너먼트 방식의 농구 대회인데요. 이맘때가 되면 미국 전역이 이 대회에 열광하는 것이 마치 ‘광란’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 경기씩 치르는 토너먼트 방식이다 보니 약체로 평가받는 팀이 강팀을 꺾는 이변이 속출하고, 무명이던 선수가 슛 한 방으로 팀을 구하는 ‘인생 경기’를 펼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는 재미도 더욱 커지는 것이죠. 저도 이번에 처음 이 대회를 보게 됐는데 NBA가 아닌 대학 농구에도 이렇게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대략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미국은 워낙 농구 인프라가 탄탄하다 보니 이 68개 팀의 경쟁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요. 운이 좋게도 제가 공부하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대(UNC), 또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사립 명문대 듀크대가 올해 3월의 광란에 동시에 무려 ‘파이널4’로 불리는 4강에 진입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파이널4’에 들어가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인데요, 거기에다 UNC와 듀크대가 4강에서 맞붙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학교는 평소에도 팽팽한 라이벌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퍼블릭아이비’라고도 불리는 UNC는 공립대, ‘남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듀크대는 사립대라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죠. 여기에다 UNC는 Tar Heels라는 농구팀이, 듀크대는 블루 데블스라는 농구팀이 있습니다. 농구의 전설 마이클 조던과 ‘덩크왕’ 빈스 카터 등이 바로 UNC 출신이고요, 현역 NBA 스타급 플레이어인 카이리 어빙, 제이슨 테이텀, 자이언 윌리엄스 등이 듀크대 출신입니다.

‘친선 경기’라도 두 학교의 농구 대결은 불꽃이 튀는데요, 사상 처음으로 3월의 광란 4강에서 마주하게 되니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경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듀크대의 전설적인 농구 감독인 마이크 슈셉스키, ‘코치 K’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예고했기 때문에 두 대학의 4강 맞대결은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이 그 의미를 상세히 보도할 정도로 전국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림 1. 듀크대와의 경기 당일인 4월 2일. 단체 응원을 위해 개방한 UNC 체육관에
경기 시작 전부터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다.

경기 당일 UNC가 소재한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과 인근 도시들이 말 그대로 광란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경기 며칠 전부터 UNC 앞 기념품 가게에서는 파이널4에 맞춰 특별 제작한 티셔츠를 팔았는데요 경기 당일엔, UNC 학생이라면 거의 모두가 이런 티셔츠를 사 입고 학교와 인근 카페 등에서 단체 응원에 나섰습니다. 저도 티셔츠를 입고 학교 앞에 가봤는데, 처음 보는 학생들이 “”Go, Heels”라고 외치며 하이 파이브를 건네기도 하더군요. 경기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열렸지만, UNC도 학교 체육관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하고 단체 응원을 독려했고 총동창회에선 응원 도구를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경기는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UNC의 극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UNC 일대는 쏟아져나온 응원 인파로 마비가 됐습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와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요? 저는 교통 체증을 우려해 경기가 끝나기 전에 먼저 빠져나와 집에서 중계를 지켜봤는데요, 학교에서 단체 응원을 끝까지 했다면 아마 그날 집에 돌아오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림 2. 듀크대와의 경기 승리 직후 UNC 인근 도로로 쏟아져나온 인파를 전하는 학교 SNS.

미국 현지 언론들은 UNC의 승리만큼이나 코치 K의 은퇴 경기가 패배로 끝났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보도를 했습니다. 생중계에서도 코치 K의 쓸쓸한 퇴장 모습을 한동안 비추더군요.

4월 4일, 3월의 광란 결승전은 UNC와 캔사스대의 대결이었습니다. 전반전까지 크게 앞섰던 UNC는 아쉽게도 후반에 캔사스대의 맹렬한 추격을 이기지 못하고 경기에서 패했습니다. 하지만 UNC는 선수들을 격려하는 한편, 감독인 휴버트 데이비스의 지도력에 찬사를 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연수하고 있는 이 지역은 작은 소도시인데, 3월의 열광 덕택에 전국적인 조명을 받게 됐습니다.

저도 평소엔 NBA나 MLB 등 미국 프로 스포츠에만 관심이 많았는데요, 이번에 대학 농구를 지켜보면서 아마추어 스포츠가 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사실 제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NC)는 MLB 프로야구팀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2020년엔 NC 주민들이 한국 프로야구팀인 NC다이노스를 응원하며 한국 야구에 빠졌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프로 농구팀의 경우엔, 2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 샬럿을 홈팀으로 한 ‘샬럿 호넷츠’가 있지요. 언젠가 한 번 경기장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면서 더 이상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미국은 스포츠의 천국, 프로팀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응원하고 열광할 수 있는 아마추어팀이 하나씩은 있지 않을까요? 실력은 프로에 아직 못 미치지만 함께 응원하는 즐거움, 지역 사회가 하나가 되는 듯한 축제 분위기만은 프로에 뒤지지 않을 겁니다. 알지 못했던 아마추어 스포츠의 매력에도 빠질 수 있는 게 미국 연수가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