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미국생활 적응하기
미국에 가봤다는 것과 미국에서 생활했다는 것의 차이점은 크다. 나는 미국 연수 오기 전 4차례 미국 출장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 사실이 미국에 대해 상당한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했지만,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경험이 별반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가 미국 출장을 다녀봤다고 해도 호텔에서 묵으며 서비스를 받기만 했지 현지에서 직접 생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경우 초기정착은 순조로웠다. 연수기관에서 초기 정착에 필요한 기본적인 안내를 도와줬기 때문이다. 우선 전화를 가설하고 인터넷을 연결하고 케이블 TV를 연결하는 일들이 며칠 사이에 이뤄졌다. 이밖에도 가스연결, 은행계좌 개설 등도 안내를 받았다. 사실 미국 도착 일주일 이내에 정착에 필요한 유틸리티 설치를 거의 마칠 수 있었으니 엄청나게 시간을 번 셈이다.
하지만 생활하면서 필요한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가족들과 장기체류를 해나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 생활을 시작한지 며칠만에 쓰레기통이 차고 넘치기 시작했다. 쓰레기 처리 하나만 해도 필요한 정보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쓰레기는 어디에 담아버리나? 쓰레기 봉투는 어디서 구하지? 쓰레기 봉투는 매일 갖다버리나? 재활용은 하는가,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처리하나?
이 경우에서 보듯이 미국에 초기 정착한 사람은 아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만큼이나 생활에 필요한 기초 정보가 없는 셈이다. 물론 옆집에 미리 정착한 한국인이 있다면 손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못해 옆집에 혼자 사는 미국 할머니에게 인사를 빙자해 문을 두들겼다. 새로 왔다는 인사를 나누고 한참 만에 쓰레기 처리문제를 끄집어내 질문을 던졌더니 자세히 설명해줬다. 이렇게 해서 이웃집 미국인과 첫 대면이 이뤄졌다.
얼마 지나자 유틸리티 청구서가 회사별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처음 청구서를 받아들었을 때는 우리처럼 지로용지도 없고 반송용 봉투만 들어있기에 수표에 해당금액을 기입해서 우편으로 처리해야 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얼마짜리 우표를 붙여야 하고 우표는 어디서 구입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쳤다.
수소문 끝에 우체국에 가지 않더라도 대형 할인점에서 우표를 취급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청구서를 할인점에 들고 가서 점원에게 보여주고서야 37센트짜리 우표를 붙이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터넷 뱅킹으로 내 은행계좌에서 유틸리티 청구서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안 것은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뒤였다. 지금은 인터넷 뱅킹으로 모든 청구서를 간편하게 처리하고 있지만 인터넷 뱅킹에 익숙해지기 까지의 과정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 직후 계좌를 개설하는 날 은행원이 인터넷 뱅킹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줬지만 그때는 영어에도 서툴고 계좌를 만드는 데만 급급해 인터넷 뱅킹에 대해 흘려들었다. 나중에 인터넷 뱅킹을 하려고 하자 어떻게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전화로 질문했지만 인터넷을 직접 보지 않고 전화상으로는 도저히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 뱅킹에 성공하기까지 집사람과 함께 세 차례나 은행지점을 직접 찾아가야 했다. 나중에는 집사람이 한숨을 쉬면서 행원에게 “미국에 와서 바보된 기분”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살면서 부딪치는 자질구레한 일은 이것뿐이 아니다.
공중전화 하나를 걸려고 해도 당장 코인을 얼마를 넣어야할지 생각이 필요하다. 가로 주차방식은 우리처럼 주차관리인이 없고 모두 자동식 코인주차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것도 이용하기 위해서는 얼마짜리 코인을 넣고, 얼마동안 이용할 수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하는데 처음에는 알기 힘든 노릇이다. 물론 공중전화든, 자동주차기든 자세히 살펴보면 이용방법이 적혀있다. 글씨가 작아 그것이 읽기 귀찮으면 옆의 미국인을 붙잡고 물어보면 된다. 생활하면서 부딪치는 사소한 일들이 모두 알고 나면 별것도 아니지만 깨우치기 전까지는 괴로움이다. 그렇다고 생활하는데 모두 필요한 일들이니 계속 모르고 눈 감은 채 지낼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런 것을 직접 부딪쳐서 해결하려는 것은 시간도 필요하고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데서 생기는 어려움도 있지만 결국은 자생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지금 이곳에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다른 주를 방문해 낮선 생활환경에 맞닥뜨리면 새롭게 알아야할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곳에서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지 20일쯤 지났을 때 차가 화재로 전소됐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한국인으로부터 구입한 일제차였는데 그 며칠 전부터 집앞 주차장에 세워둔 차 밑으로 다람쥐 한 마리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 목격됐다. 우리 가족들은 날씨가 더우니까 차 밑의 그늘에 다람쥐가 집을 지으려는가 보다 짐작하고 다람쥐를 겁을 줘 쫓아버리기도 했다.얼마 후 나와 집사람이 시에서 운영하는 운동센타(헬스)까지 그 차를 몰고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운동을 하고 있는데 주차장에 소방차가 와서 우리 차에 붙은 불을 끄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차에 달려갔을 때는 차의 엔진룸이 전소된 상태였다.
큰 일을 당할 때일수록 침착하라는 격언이 생각나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소방관과 얘기를 해나갔지만 당황한 나머지 내 영어가 막 엉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웃음거리 한가지. 소방관에게 사고 개요를 설명하는데 당황해서인지 다람쥐(squirrel)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이 단어에 막혀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와이프는 ‘쥐처럼 생기고, 호두(nut)를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말로 설명해 소방관을 납득시켰다. 강한 한국 아줌마의 파워!
불을 끄고 차의 엔진룸을 들여다보니 다람쥐가 가져다놨음이 분명한 마른 잡초와 잔 나뭇가지들이 상당히 쌓여있고 일부는 불에 탄 상태였다. 짐작컨대 다람쥐가 엔진룸에 집을 지으려고 갖다논 잡초가 차 운행중에 뜨거워진 엔진열이나 전기배선의 스파크 때문에 불이 붙었다가 주차된 사이에 계속 번진 것이 화재원인이 아닌가 싶다. 미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난 이 사건 때문에 나와 와이프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크게 마음고생을 했다.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고 일처리를 해나갈지 막막해 학교 관계자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보험처리부터 보상완료까지 한달도 더 넘게 걸리는 기간동안 매 사안마다 일일이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워 나중에는 혼자서 끙끙댔다. 보험회사 직원들과의 전화통화 및 사고경위서 제출, 소방서와의 연락, 자동차 등록세 환급 등 뒤처리를 하는데 너무 머리가 아파 중간에는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전소된 차는 보험회사가 가격을 산정해 보상한 뒤 인수해가고 자동차 등록세는 새로 산 차를 등록할 때 그만큼 할인받는 식으로 해결됐다.
보험가입시의 면책금액(500달러)과 차량을 인수한 뒤 새로 교체한 타이어비용 만큼 손해를 본 것으로 마무리됐다.
보험회사와 접촉할 때 가장 애를 먹은 것 중의 하나는 전화자동응답기와의 응대이다. 미국의 왠만한 회사들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교환원을 두지 않고 자동응답기 시스템을 채용한다. 그런데 영어 리스닝에 서툰 나로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말하는 자동응답기를 여러 단계 쫓아가 원하는 부서, 원하는 담당자와 연결하는데 무척 힘들었다. 이것은 나중에 다른 미국회사에 전화를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사람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라면 “좀더 천천히 말씀해 주십시오” 혹은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말하면 되지만 자동응답기는 그런 것이 불가능한 일방통행형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전화를 건 곳에서 자동응답기 응대가 나오면 먼저 인상이 찌뿌려진다. “으, 또 골머리 좀 썩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