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과 함께 미국의 ‘소프트 파워’ 산실은 4천여개에 달하는 대학이다. 미국 대학은 현지 미국인들과 세계에서 몰려든 인재들이 함께 지역성과 특수성을 반영한 연구를 하는 플랫폼이다. 그런데 워싱턴 DC에는 또 하나의 ‘소셜 연구 플랫폼’이 있다. 바로 싱크탱크다. 미국 정부 정책과 세계 담론에 영향을 끼치는 유명 싱크탱크들이 이곳에 몰려있다.
DC에 정착할 때도 싱크탱크와의 접근성을 고려했다. 연수자들이 자연스럽게 주거지로 선택하는 버지니아 대신 다소 비싸고 낙후됐더라도 DC에서 아파트를 물색했다. DC의 아파트들은 대부분 오래되어 바퀴벌레가 나오는 곳도 더러 있었다. 21세기에 바퀴벌레가 나오는 집이라니. 바퀴벌레를 피하고 우범지대를 피하면서 예산에 맞는 아파트를 찾느라 어려움이 컸다. 안전하고 깨끗한 아파트는 세입자 면접이 까다로워 거절당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도 가깝고 싱크탱크들이 밀집한 지역에 안착했다.
제일 먼저 주요 연구소에 이메일을 등록했다.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edu), 미국기업연구소(aei.org),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org), 헤리티지재단(heritage.org),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com) 등 저명한 연구기관의 뉴스레터를 구독하니, 다음날부터 메일함에는 그들이 발표하는 리포트, 이벤트 안내 소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연구주제를 포함해 다양한 관심 분야의 세미나에 등록했다. 첫 세미나는 브루킹스에서 열린 미국과 한국, 대만 등 동맹국과의 반도체 공급망 강화 문제였다. 그런데 생각한 것보다 영어가 너무 안 들려 당황했다. 집에 와서 홈페이지에서 올라온 영상을 다시 보며 내용을 파악해야 했다. 싱크탱크 첫 경험은 그랬다. 그래도 ‘듣다보면 들리겠지’ 하며 계속 세미나에 참석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세미나를 들어도 되지만 현장에 오면 확실히 체감하는 수준이 다르다. 미국사람들의 대화 습관, 네트워킹 문화도 경험한다. 행사장 한쪽에는 다과가 차려져 있는데 참석자들은 토론 전후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한다. 혼자 있으면 가끔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는 어디서 일하는 누구인데 너는 소속이 어디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세미나 주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말하고는 내 의견도 묻는다. 처음엔 영어에 자신도 없는데다 이런 문화가 익숙지 않아 당황했는데 몇 번 겪고 나니 이젠 좀 편해졌다.
이곳의 싱크탱크들은 현안이 생기면 발 빠르게 보고서를 내고 토론 자리를 마련한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바이든 행정부의 AI 규제 등 인공지능 문제가 주요 이슈로 다뤄지며 관련 행사가 많았다. 톰 휠러 전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과 마이클 베넷, 피터 웰치 두 상원의원이 함께 기술 혁신 과정에서 공익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브루킹스에서 있었다. 두 상원의원은 디지털 플랫폼 규제를 위한 연방기관 설립 법안을 발의했는데,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지금 디지털 시대를 장악한 거대 기업들을 보유한 나라가 늦게나마 디지털 기술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기술과 인권이 양립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올해는 11월 대선이라는 중요한 정치행사를 앞두고 있는 만큼 양극화된 미국의 정치 환경, 전통 미디어 신뢰 위기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 지난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당시 논란이 된 칼럼 게재로 회사를 떠나야 했던 제임스 베넷 전 <뉴욕 타임스> 오피니언 편집자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인상적이었다. 경찰폭력과 인종차별에 전국이 분노할 때 베넷 기자는 ‘폭력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내용의 톰 코튼 상원의원의 기고문을 실었다가 뉴욕 타임스 기자들의 집단 항의로 사표를 썼다. 뉴욕 타임스에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그는 최근 미국기업연구소에서 열린 ‘반자유주의 : 미국 미디어와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주제의 토론에서 과거와 달라지는 미디어 환경, 논쟁이 사라져가는 언론에 대해 얘기했다. 디지털 전환에 성공했다고 평가받고 전 세계 언론의 부러움을 사는 뉴욕 타임스도 한국 언론과 같은 내부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고, 그가 던진 주제가 지금 내가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해서 공감이 갔다.
연구소를 돌아다니다보면, 정부와 대중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로서 싱크탱크가 뿌리내린 이 나라 특유의 시스템을 알게 된다. 연구소들은 정부 정책을 홍보하고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오피니언 리더나 대중이 느끼는 문제를 의제로 만들어 이론적 검토를 거쳐 정책제안으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정책이 그만큼 대중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는 뜻이다.
싱크탱크 외에도 주요 대학에서 열리는 공개강연도 참석한다. DC에 있는 조지워싱턴대, 조지타운대 외에 다른 주의 유명 대학들이 이곳에 캠퍼스를 두는 경우가 많다. 존스홉킨스대학은 메릴랜드주에 있지만 국제관계대학원(SAIS) 캠퍼스는 DC에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권력과 진보> 저자로 유명한 대런 아세모글루 MIT 교수가 이 캠퍼스에 초청돼 존스홉킨스대 학생들과 질의응답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DC는 하나의 거대한 캠퍼스였다. 대학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 나아가 세계를 무대로 당면한 의제를 다루는 싱크탱크들은 살아있는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경험을 소개하는 건 단지 DC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기 좋은 곳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싱크탱크가 뿌리내릴 수 있는 미국의 토양이 부럽고, 이런 지적 플랫폼이 한국에도 탄탄하게 자리잡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