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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의 공공도서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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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이 아름다운 DC의 사우스웨스트 도서관.

내가 연수국가로 미국을 선택한 것은 미국의 힘이 어디서 생겨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디지털 시대를 지배하는 미국의 ‘소프트 파워’가 궁금했다. 소속 대학에 다니면서 연구 인프라를 경험하겠지만 일상에서는 지적 토양의 기본이 되는 동네 도서관에서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인구 71만명의 도시 DC에는 공공도서관 26개가 있다. 도서관 한 곳당 인구가 2만7천명인 셈이다. 서울의 도서관 한 곳당 인구(4만7천명)에 비하면 도서관 인프라가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도서관 수로 얘기하는 건 미국 도서관의 본질을 떠난 것이다. 이 26개 도서관이 개별 도서관으로 존재하지 않고 마치 하나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게 핵심이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회원가입을 하고 도서관 카드를 발급받으면 이 카드 한 장으로 26개 도서관을 자유롭게 출입하고 책을 대출받고 각종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DC 공공도서관 대표 홈페이지가 허브 역할을 한다. 여기에 접속해 빌리고 싶은 책을 검색한다. 해당 책이 어느 도서관에 몇 권 있는지 뜬다. 만약 집에서 먼 도서관에 책이 있으면 수령 장소를 집 근처 도서관으로 지정해 대출 신청을 하면 된다. 2~3일 뒤면 책이 해당 도서관으로 배달되고 가서 찾으면 된다. 기본 대출 기간은 3주지만 대기자가 없으면 열 번까지 연장할 수 있다. 동시에 빌릴 수 있는 책은 50권까지다. 원하는 만큼 책을 가져가 충분히 공부하라는 의미로 읽힌다. 도서관에서 하루 20장까지 무료 출력 서비스도 제공한다.

각 도서관에는 스터디룸, 미팅룸, 컨퍼런스룸 등 별도 공간이 마련돼있다.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도서관의 빈 회의실을 예약하면 된다. 하루 한 번 최대 세 시간 쓸 수 있다. 가끔 화상회의를 할 일이 생기면 가까운 도서관의 룸을 예약해 사용했다.

온라인 서비스도 다양하다. 전자책, 오디오자료 등이 풍부하다. ‘프레스리더(PressReader)’라는 앱을 다운받아 도서관 회원번호로 로그인하면 세계 주요 신문, 잡지를 지면 형태로 볼 수 있다. <뉴욕 타임스>, <이코노미스트> 등 세계 120개 나라의 7천개 간행물이 등록돼있다.

도서관 홈페이지는 7개 언어로 서비스된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한국어, 중국어, 베트남어, 암하라어(에티오피아 공용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더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각 도서관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강좌, 문화행사가 자주 열린다.

마틴 루터 킹 메모리얼 도서관 열람실 모습

26개 도서관 중 내가 가장 자주 이용한 곳은 마틴 루터 킹 메모리얼 도서관이다. 백악관 근처 시내 중심부에 있어 오다가다 머무르기에도 좋았다. 5층짜리 건물인데 공공도서관 가운데 가장 크고,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이후 2020년 재개장해 시설이 깨끗하다. 성인, 틴에이저, 키즈로 나뉜 열람실도 공간이 충분해 여유롭다. 1층엔 사회적 기업 ‘디씨 센트럴 키친(DC central kitchen)’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는데, 커피나 빵 가격이 일반 카페의 절반 수준이다.

DC 도서관은 편리하고 여유롭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미국 도서관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DC의 대표 관광코스 ‘의회도서관’을 보면 그렇다. 의회의사당 맞은편에 자리한 이 도서관은 세계 최대 규모로, 도서 2500만권을 포함해 각종 문서, 디지털 자료 등 1억7천만 개 이상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1897년에 지은 토머스 제퍼슨 빌딩을 비롯해 3개 건물로 구성돼있다. 고전 양식으로 건축된 제퍼슨 빌딩에 들어서면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의회도서관 메인리딩룸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도서관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다. 미국인들은 기능적인(functionality) 사고방식을 가졌다. 도시의 목적물도 기능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배치돼있다. 그런 미국이 도서관만큼은 사치스럽다면 사치스럽고, 웅장하다면 쓸데없이 웅장하다. 자랑거리로 삼으려 했다면 충분히 자랑해도 될 정도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도서관을 최고의 위치에 두고 적극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에서 도서관 이용은 전반적으로 즐겁고 공부를 하고 싶게 한다. 쾌적하다는 분위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미국의 지적 토양은 보편적이고 뿌리는 깊고 폭넓다. 미국 사회에서 적어도 지적 성취는 존경과 권위의 대상이고 충분한 보상이 약속되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그 중심에 도서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세계 인재를 몰려들게 하는 미국의 힘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