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정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오.”
처음 한 두 달은 그냥 왔던 짐을 그대로 싸 들고 갈 요량으로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미제라면
환장을 했던 어린 시절이 이제는 촌스럽기도 하거니와 근자에는 우리나라 제품들도 미제와 견주
어 전혀 손색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같은 제품인데도 한국에 비해 절반 가까이 저렴한
물건들이 곳곳에서 사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쇼핑의 천국에서 나의 초심은 몇 달을 가지 못했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10년 쓴 침대를 버리고 온 탓에 우리의 쇼핑 리스트 1호는 침대였다. 만성
요통으로 고통 받는 나를 위해 침대만큼은 돈을 좀 주고라도 좋은 것을 사겠노라며 메모리 폼으
로 유명한 T사의 침대가 언제 할인에 들어갈 지 호시탐탐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T사는 할인을 하지 않았다. T사 제품을 취급하는 딜러들은 하나같이 “롤렉스처럼
할인을 하지 않는 것이 T사의 정책”이라며 가격은 한 푼도 깎아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신 선심 쓰듯 베개 하나 정도는 얹어 주겠다며 구입을 유혹했다. 집에 돌아와 T사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더니, 웬걸, 침대를 사면 베개나 침대 커버 같은 액세서리들을 300불 어치 주는 행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 미국 상인들이 솔직하다고 했던가. 하마터면 거저 3개 얻을 베개를 1개만 얻고도 고맙다
머리를 숙일 뻔 했다. 혹시나 싶어 마지막으로 가장 고객 평가가 괜찮았던 딜러를 찾아갔다. 모른
척 하며 침대 가격을 묻자 이곳에서는 먼저 그 행사 내용부터 알려줬다. 적어도 다른 곳처럼 속여
장사하는 곳은 아니겠다 싶어 내심 구매를 결정해 놓고는 “그래도 다른 곳과 다른 특별한 점이
있어야 이 곳에서 살 것이 아닌가?”라며 슬쩍 떠봤다. 그랬더니 그 곳의 매니저는 “본사 가격
정책을 위반할 수 없으니 침대 가격을 깎아줄 수는 없지만, 행사 조건을 100불 어치 더 줄 수 있
다.”는 답변을 그 자리서 내놨다. 본격적인 구매 과정에서 그다지 힘들지 않은 밀당 끝에 200불
정도 하는 침대 프레임도 덤으로 얻었다. 적지 않은 발품과 기분 좋은 흥정 끝에 처음에 갔던 딜러
에서보다 6백불 이상 좋은 조건으로 침대를 구입한 것이다.
“항의하라. 그러면 더 얻을 것이니…”
침대 구입의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배송을 받고 보니 침대와 함께 구입한 베개 2개 중
하나가 빠져 있었다. 나머지 베개는 따로 배송될 것이라는 직원의 말을 듣고 2주 정도를 더 기다
렸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어찌된 일이냐고 정중하게 따
졌더니 배송이 늦어진 점을 인정하며 사과의 뜻으로 베개를 두 개나 더 얹어 보내줬다. 행사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고가의 베개가 4개나 생겼으니 도리어 고마울 지경이었다. 적절한 타
이밍에 항의를 한 것이 주효한 셈이다. 미국에서의 항의는 이유만 적절하다면 이렇듯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스포츠용품으로 유명한 S매장에서도 예의 ‘항의’가 위력을 발휘했다. 함께 간 B형이 골프 퍼터
를하나 골랐는데 새 제품임에도 스크래치가 많았다. 진열돼 있던 것을 이 사람 저 사람이 시타를
했던 탓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새 것 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매장 직원을 불러
조용히 항의했다. 매장 직원은 이리 저리 퍼터를 살펴 보더니 바로 매니저를 데리고 왔다. 매니저는
먼저 같은 모델의 새 제품이 없다는 점을 사과한 뒤 해당 제품을 사겠다면 30%를 할인해 주겠다고
그 자리에서 제안했다. 작은 스크래치 몇 개에 30% 할인이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지난 7개월 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느낀 점은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고객의 입장이 우선된다는
것이다. 상인이나 기업들은 소비자의 합당한 항의에 귀 기울일 줄 알고, 항의에 대한 반응은 즉각
적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는 항의도 흥정도 즐거운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악용하
려는 블랙컨슈머들은 물론 이곳에도 있다. 그 가운데 한인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블랙프라이데이 당시에는 일부 업체에서 한국에서의 온라인 구매를 금지하기도 했다. 그만
큼 한국인 블랙컨슈머의 악명이 높다는 얘기다. 거칠기 일쑤인 흥정과 싸움으로 이어지곤 하는 항의
에 익숙한 우리의 풍토가 블랙컨슈머를 양산하는 것은 아닌 지 걱정스럽다. 기업과 소비자 모두가
흥정과 항의에 조금 더 유연하게 반응한다면 블랙컨슈머 같은 기형도 조금은 줄어들 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