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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speak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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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줄곧 땅 위에서만 살던 생물이 “자, 오늘부터는 물속에서도 숨 쉴 줄 알아야 해!”라는 명령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모국어로 살아왔는데,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영어로 소통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컬럼비아대 방문연구원이 이렇게 영어를 못한다고?’ 하고 생각할까 봐 괜히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요. 게다가 미국인들은 왜 이리 낯선 사람과 스몰토크를 좋아하는지, 그들의 호의를 항상 미소로 넘기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생존의 문제여서인지, 미국 생활 초기에는 빠르게 영어가 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치가 빨라졌는데요, 상대방이 하는 말 일부는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전체 맥락은 파악해서 적당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서로 주고받는 말이 늘어나면 말문이 막히는 현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을 해 봐야겠죠. 영어를 공부할 방법을 찾아보게 됐습니다.

ESL 수업 듣기

제가 거주하는 지역의 도서관에서는 성인 회원을 대상으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업을 제공합니다. 제가 ESL 수업을 신청하러 갔을 때는 이미 선착순 등록이 마감된 상태였지만,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기다리니 수업 시작 전 제 차례가 왔습니다. 반 배정을 위한 인터뷰를 마친 뒤,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 ESL 수업의 장점은 저렴한 수업료(Fort Lee 도서관의 경우 11회 수업에 30달러)입니다. 선생님들은 자원봉사자들입니다. 단 결석이 잦으면 퇴출당하고, 다음 분기 ESL 수업 신청에 불이익이 있다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ESL 선생님은 90분의 수업 시간(일주일에 1회)을 충실하게 꽉 채워서 진행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기 위해 시간을 연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선생님의 이런 열정 앞에서 대충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컬럼비아대 티처스 칼리지의 CLP(Community Language Program) 수업도 들었습니다. 회화, 문법, 쓰기, 발음 등 수업이 세분화되어 있어 목적에 맞춰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2025년 봄학기 기준, 30시간 수업에 350~425달러로 도서관 수업에 비해 비용이 높습니다. 원래는 대면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Zoom으로 진행되는 문법/쓰기 수업을 수강했습니다.

컬럼비아대 티처스 칼리지의 문법/쓰기 교재.

도서관 수업이 실생활 중심의 소통 능력 향상에 중점을 둔다면, CLP의 문법/쓰기 수업은 학술적 글쓰기 등 보다 전문적인 언어 능력을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수업마다 방향성이 다르므로, 예산과 시간에 여유가 없다면 미리 수업 성격을 문의해보는 걸 추천합니다.

영어 노출만이 왕도

영어 사용량이 늘어야 영어 실력이 향상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실천이 힘들 뿐이지요.

도서관 ESL 선생님은 동화책 오디오북을 많이 들으라고 조언했습니다. 지역 도서관에 가입하면 무료로 오디오북을 빌릴 수 있습니다. ESL 학습자용 책도 다양한데,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있고, 분량이 많지 않아 부담 없이 읽기 좋습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배경이 뉴욕이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주인공 부부가 그렇게 쪼들리며 살던 이유가 뉴욕의 무시무시한 임대료 때문이었다니! <주홍글씨>를 다시 읽었는데, 남주인공이 어찌나 답답하고 우유부단한지, 여주인공의 남자 보는 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요즘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고 있습니다. 격정적인 로맨스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여주인공도 남주인공도 성격에 문제가 있어 보이네요.

영어 학습 앱도 꽤 도움이 됩니다. 실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을 반복해서 익히는 게 특히 유용했습니다. 특히 특정 상황(커피 주문, 길 묻기 등)을 시나리오로 연습하는 기능이 실전에 적용하기 좋았습니다.

학교에도 자주 갔습니다. 강의에서 컬럼비아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의견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았습니다. 수업 중 교수의 오류를 지적하는 학생, 실수를 인정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교수. 수평적인 문화가 참 인상 깊었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용기 내서 방문연구원 교류 행사에도 참여했는데, 다들 너무 ‘핵인싸’라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영어와 같은 계열인 게르만어파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도 영어로 고생하더라고요. 우리만 힘든 게 아니라니,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앞으로 영어가 조금은 더 편해지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