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전의 일이다. 3년차 기자였던 나는 나눔캠페인에 파견됐다. 한겨레신문사가 아름다운 재단과
함께 벌인 ‘나눔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기획이었다. 나는 기부와 관련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
하는 일을 맡았다. 언론사 캠페인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돕는 ‘시혜적’ 차원에 머물
렀다면 당시 캠페인은 지속가능한 기부문화에 초점을 둔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국을 돌며 만났던 여러 사람들이 기억에 남지만 특히 류무종 한국다이아덴트 대표이사가 또렷하다.
당시 70살이었던 류 대표이사는 아름다운 재단의 기부문화도서관 관장이었다. 그는 수십년 간 사업차
북미 지역을 오가며 각종 기부 관련 책을 모았고 아름다운 재단이 만들어지자 수백권의 책을 기부했다.
그는 특히 좋은 일을 위해 기금을 모을 때도 주먹구구식으로 하기보다 신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면 훨씬 효과적이라고 했다. 기부문화를 담당한 기자였지만 당시 나의 이해는
피상적이었던 것 같다. 미국은 복지는 엉망이지만 그저 사람들이 기부를 열심히 하면서 부족한 복지
의 부분을 채워나가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지난 1년간 미국에서 살아 보니 기부는 이들의 생활문화로 굳어져 있었다. 특히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뼛속 깊이 기부 문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귀국짐을 싸며 아이가 소중하게 다룬 것 중 하나가 검은색 티셔츠다. 그 옷 가슴에는 금색 큰 글씨로
‘HENRY OUR HERO’라고 써있다. 학교에서 5달러에 구입한 옷이다. 헨리가 누구길래 자신들의 영웅이
라고 할까? 3학년짜리 아들녀석의 같은 반 친구였는데 함께 학교를 다닌 기간은 서너달밖에 안 된다.
소아암 투병 중이라 학교 대신 병원에서 지내는 터였다. 학교에선 지역사회와 손잡고 헨리 돕기에 대
대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였다. 학교는 수시로 헨리를 응원하는 문구가 새겨진 고무팔찌와 티셔츠 등을
아이들에게 팔았고, 특정 날짜를 정해 가족과 함께 동네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 일부 수익금이 헨
리를 돕는 데 쓰인다고 알려왔다. 몇차례 책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북페어도 학교에서 열렸다. 좋은 취
지에 동의한 출판사나 저자로부터 책을 기부 받은 뒤 학생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하고 수익금을 모금하
는 방식이었다.
평소 학교발전을 위한 모금을 하는 데도 같은 방식을 썼다. ‘좋은 일’임을 크게 강조하면서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내달라는 호소는 없었다. 모금을 광고하는 그들의 태도는 상당히 쿨하고도 즐거워 보
였다. 북페어는 아이가 평소에 읽고 싶어하는 책들로 채워져 문전성시를 이뤘고 헨리를 응원하는 글
귀가 써진 티셔츠나 팔찌 역시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이 기쁘고 즐겁게 입고 기억할 만
한 물건들이었다. 설혹 모금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눈치를 보거나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분위기
가 그랬다.
기나긴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직전 헨리는 학교를 찾아왔다고 한다. 아이들은 모두 헨리를 응원하는 티
셔츠를 입고 색색의 팔찌를 차고 등교했다. 긴 투병으로 머리카락도 없는 헨리는 기쁘게 웃으며 고마
움을 표현했다고 아이는 전했다.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미국 전 지역이 그렇진
않겠으나 최소한 내가 1년을 지낸 이 동네만은 지역사회가 살아있어, 학교와 힘을 모아 뭔가를 해내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