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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 전파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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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미국인 친구 T와 함께 만든 한국음식.

연수 오기 전부터 미국에서 주어진 1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생각했다. 우선 365일 시간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다. 그건 분명히 관광객의 성격은 아니었다. 삶의 문제였다.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일이 있어야 하고, 하루의 시간을 채울 공간이 필요하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 속에서 나는 어떤 일상을 마주하게 될까.

어렵사리 집이 정해지고 나름대로 일상을 채워나갔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은 금세 낯이 익었지만 대화는 “안녕” 하는 인사로 충분했다. 세미나도 찾아가고 도서관도 가지만 현지인과의 &만남&을 갖지 못했다. 대화가 필요했다. 일상을 채우는 대부분이 ‘말하는 것’인데 나는 말할 상대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외로움과는 다른 허전한 느낌의 실체는 대화 부재였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미국인 친구가 필요했다. 어떻게 사귈 수 있나 고민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언어교환 사이트에서 미국인 친구 &T&를 만나게 됐다. 한국어 선생이 필요한 T와 영어 말동무가 절실한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럭저럭 4개월 만에 미국의 일상이 완성됐다.

T가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K드라마다. 그는 2020년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K드라마에 입문했다. 그걸 시작으로 스무 편 정도 봤다고 한다. 그 중엔 나는 이름도 생소한 ‘쇼핑왕 루이’, ‘오 나의 비너스’ 같은 드라마도 있었다. 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물었더니 스토리 라인이 굉장히 재밌다고 했다. 예컨대 계층 간, 가족 내 그려지는 역학관계가 흥미롭고,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케미스트리가 매우 좋다는 것이다.

T는 미국과는 다른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점도 매력으로 꼽았다. “미국은 다양한 출신들이 모인 용광로 같은 곳이라 특정한 ‘미국 문화’라고 할 만 한 게 없지만, 한국은 동질적인 사회이고 전통이 잘 유지되고 있잖아. 결혼이나 장례 같은 한국 전통문화를 보는 게 재밌어.” 평소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 나는 미국인 친구의 눈을 통해 K드라마를 매력을 알게 됐다. 기사로만 접하던 K컬처의 인기를 실감한 것도 뿌듯했다.

아무튼 자막 없이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게 목표인 T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나도 새삼 한국어 공부를 다시 하고 있다. T는 이미 독학으로 한글을 익힌 상태였다. 나는 한국어 기초 문장을 함께 읽으며 문법을 알려준다.

T가 사용하는 한국어 교재

나는 무엇보다 한국어의 원리를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전문가들조차 우리 언어 대해 &한글은 쉽지만 한국어는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인식을 깨고 싶었다. 흔히 한국어가 어렵게 느껴지는 요소로 존댓말 체계, 다양한 동사 활용 등이 언급된다. 동사 활용을 설명할 땐, 어근은 그대로 두고 시제나 상대에 따라 어미만 바꾸면 되는 원리를 강조했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 같은 유럽언어는 인칭(나, 너, 그..)과 수(단수, 복수)에 따라서도 동사가 변하는데 한국어 동사는 바뀌지 않는다. T도 &유럽 언어에 비하면 한국어의 동사 활용이 복잡한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경어체계는 가장 보편적인 &해요&체를 중심으로 설명했다. T는 나이 많은 사람이나 직장 상사에게 높임말을 쓰는 우리 관습도 좋게 봤다. 상대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표현이 많은 건 좋지 않냐고 했다. 요즘은 사람들의 말이나 태도가 너무 거칠어서 문제인데, 이런 존댓말이 질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종종 불만으로 여기는 경어체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T에게 살짝 감동했다.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직역해 비교해 설명하다보면 직역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생긴다. 그게 곧 한국어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걸 발견한다. 영어는 문법에 따라 단어를 조합하는 규칙이 엄격한 편이지만, 한국어는 상황에 따라 주어나 특정 요소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영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화자의 세밀한 감정을 언어로 풍부하게 나타낼 수 있다. 그만큼 맥락을, 대화하는 사람을 중심에 두는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한국어의 원리나 기저에 깔린 가치관을 설명하니 T도 곧잘 이해했다.

우리는 꼭 언어공부가 아니더라도 종종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대계인 그는 H마트에도 자주 가는데 채소가 많이 들어가는 한국음식이 이스라엘 음식과 비슷해서 좋다고 했다. 지난 설날 때는 한국의 명절문화를 체험해보고 싶다며 자기 집에서 같이 만두를 빚자고 했다. 살면서 한번도 만두를 직접 빚어본 적 없는 나는 전날 급하게 유튜브에서 ‘만두 예쁘게 빚는 법’ 영상을 몇 개 찾아보고 갔다. T는 만두뿐만 아니라 잡채, 불고기, 파전 재료도 사다놓았다. T의 또 다른 한국인 친구도 합류했는데, 셋이서 만두를 빚고 떡국을 끓이고 명절상인지 잔칫상인지 모를 진수성찬을 차렸다.

뭐든지 배를 채우고 나면 생각나는 것이 놀이다. T는 이날도 ‘K푸드 체험’을 한 다음 ‘K게임’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는 &응답하라 1988&에 나온 고스톱 장면을 보고 고스톱을 배우고 싶다면서 화투를 꺼냈다. 아마존에서 화투를 구입했단다. 함께 한 한국인 H도 고스톱을 칠 줄 모른다기에 졸지에 나는 고스톱 선생이 됐다.

우선 화투패의 열두 달 그림을 익히게 한 뒤 같은 그림끼리 맞추는 진행방식을 설명했다. 다음은 점수계산법. 광, 고도리, 홍﹒청﹒초단, 열끗(멍텅구리)을 알려줬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는데, 흔들기, 폭탄, 뻑, 따닥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이걸 설명하는 게 어려웠다. T는 왜 이런 규칙이 있는지 물었고, 뻑이 난 패를 가져가는 사람한테 자기가 딴 피를 한장씩 주는 건 왜 그러느냐고 궁금해했다. 사실 한번도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은 거라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원래 그런 거라고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어쨌든 판이 두세 번 돌아가자 T는 금세 룰을 익혔다. T는 재밌다고 했지만 내가 기대한 만큼의 즐거운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고스톱은 게임 중 뻑이 나면 “쌌네” 하고 놀리고 누구는 박장대소하고 누구는 열 받기도 하는, 결국엔 서로 웃고 떠들며 흥이 오르는 놀이다. 이날은 그런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집에 와서 화투놀이를 리뷰해봤다. T가 물었던 것들, 화투놀이에서 가장 재미있는 룰을 정확하게 이해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흥이 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고스톱에 있는 여러 변수는 게임을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하게 만든다. 이길 것 같다가도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어 끝까지 승자와 패자를 알 수 없다. 생각해보면 고스톱 용어들도 참 익살스러운데 그런 맛을 잘 전달하지 못했다.

T에게 한국문화를 알려주면서 평소 당연하다고 여기며 지나쳤던 것들을 곱씹어본다.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더니 나 역시 누군가가 한국을 궁금해 할 때 막힘없이 잘 설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어를 배우러 왔다가 한국어를 더 사랑하게 되고 미국 문화를 접하러 왔다가 한국 문화에 다시 눈뜨게 됐다.

지금 T와는 언어교환을 넘어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필요한 게 있으면 서로 돕는 친구가 됐다. 덕분에 미국에서의 내 삶은 풍부해지는 중이다. 시공간의 낯섦을 털어내고 일상을 즐기는 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