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나이로 6,7세인 딸 둘과 LA로 연수를 왔다. 소위 ‘독박 육아’를 시작한 셈인데, 처음 몇 달은
그 어감만큼이나 녹록치 않았다. 가장 고된 건 주말이었다. 평일에야 방과 후 수업을 마치면 오후 3~4시
전후라지만 토요일,일요일은 48시간을 함께 하자니 솔직히 버거웠다. 주말 여행도 쉽지 않았다. 그것은
독박 운전, 독박 가이드, 독박 안전요원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그럴 때 한국의 실내 놀이터, 소위 키즈
카페가 그립기만 했다.
그러다 찾은 해법이 미술관이었다. 갤러리라니-. 처음엔 한국에서의 경험을 떠올리고 애들과는 상극이라
여겼다. 떠들면 안 되고, 뭘 만져도 안 되고, 어른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몇 년 전 서울 한남
동 리움 갤러리가 아니쉬 카푸어 작품을 야외에 전시했을 때,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레이저 쏘듯 바라
보던 스태프들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미국, 적어도 LA에서 가 본 갤러리는 ‘키즈 프렌
드리’한 곳이 많았다.
스커볼 문화센터(Skirball Cultural Center)와 지머 어린이 뮤지엄(Zimmer Children’s Museum)처럼
아예 어린이 전용을 표방한 장소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즐겨 찾은 곳은 미 서부에서
가장 큰 뮤지엄, 라크마(LACMA, LA카운티 미술관)이었다. 여기에선 일단 17세 이하 어린이 및 청소년이
NEXGEN 회원으로 무료 가입하면 일반 전시는 모두 공짜다. 관람도 관람이지만 아이들이 즐길 공간이
있어 좋다.
분 칠드런스 갤러리(Boone Children’s Gallery)라는 곳인데, 들어 가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물감과 붓,
물통이 놓여져 있고 누구든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묻히지 마라, 흘리지 마라 하는 엄마 잔소리가
없어선지 아이들은 한 시간 넘게 머문다. 처음엔 유치하게만 보이는 공주님만 그렸는데 요즘엔 점묘법을
활용한 추상화에도 도전한다. 벽면 가득 붙은 또래들의 그림에서 뭔가 느끼는 게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라크마의 분 칠드런스 갤러리. 여기에서는 아이들이 시간이나 주제의 제약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라크마 전시장에서 만난 스태프가 찍어 준 가족 사진. 먼저 다가와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라고
제안했다.
LA 갤러리 중엔 무료로 운영하는 가족 워크숍 프로그램도 많다. 보통 무료이고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받는다. 워크숍이라 해봐야 별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남다르다. 라크마의 경우 갤러리 광장 바닥에 큰
무명천을 깔고 앉아 아이와 작품을 만든다. 언젠가는 색색 가지 셀로판 종이를 오려 붙이는 공작이었는데,
처음엔 영 어색하다가 옆 가족 하는 걸 보고 슬슬 욕심을 내는 나를 발견하며 혼자 웃었다. 뭐가 됐든
부모가 ‘놀아주는’ 게 아니라 ‘함께 노는’ 방식이라는 게 특징이다.
가족 워크숍에 더 말해보면 ‘더 브로드(The Broad)’ 뮤지엄의 프로그램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곳은
지난해 9월 다운타운의 월트 디즈니홀 옆에 새로 문을 열었는데, 현재 LA에서 가장 뜨는 뮤지엄으로 입소
문이 난 상태. 예약제로만 운영되고, 두 달 전 입장권이 이미 솔드 아웃일 정도다. 가족 워크숍 역시 온
라인 등록 개시 한 나절 만에 모든 시간대가 매진됐다. 실제 참가해 프로그램을 보니 그 인기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너 자신을 꾸며봐(Creative yourself!) 라는 코너에서는 참가자들이 반
전신 사진을 촬영하고 본인의 흑백 사진을 받았다. 그 뒤 사진을 변형하는 게 과제였다. 방법은 갤러리의
대표 소장품인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바바라 크루거의 현대 미술작들을 연상시키듯 사진 위에
색칠을 하고, 투명 스티커를 붙이고, 문구를 적어 놓는 것. 처음엔 아이들만 시켰는데 보기보다 재미있게
보여 슬며시 나도 카메라 앞에 서 버렸다. 그리고 당시엔 몰랐지만 그런 경험이 꼭 놀이만은 아니었나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워크숍을 다녀 온 큰 딸은 자기가 꾸몄던 사진이 앤디 워홀의 그림과 비슷하
다는 걸 다른 갤러리에서 발견하고는 무척이나 흥미로워했다.
*더 브로드 뮤지엄의 가족 워크숍 중 일부. 자신의 사진을 현대미술 작가의 화법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이다.
하지만 교육 효과를 떠나 LA의 갤러리들은 뭘 그리거나 만들거나 보지 않아도 아이들과 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종종 느낀다. 게티 센터나 게티 빌라만 해도 그렇다. 아무래도 미술관이다 보니 조경이며
건축 구조만 봐도 눈이 호사스럽다. 너른 잔디밭과 시원한 분수, 아이스크림과 커피 한 잔을 파는 카페
테리아만 있어도 엄마와 아이가 모두 행복하다. 사우스 패서디나의 놀턴 사이먼 뮤지엄(Norton Simon
Museum)과 헌팅턴 라이브러리 뮤지엄(the huntington libraray) 도 이 맥락에서 보면 강추 할 장소다.
소장품도 소장품이지만 아름다운 정원만 즐기고 와도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