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LA를 대표하는 대학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인 UCLA와 사립인 USC입니다. 언론인뿐 아니라 많은 법조인과 공직자들이 이 두 대학을 연수지로 택합니다. USC 한국학 연구소에서 어드미션을 받은 뒤 서둘러 결정해야 할 것은 어디에 1년 연수 생활의 둥지를 트느냐였습니다.
이런저런 선택지들 가운데 저는 LA 카운티의 팔로스버디스(Palos Verdes)를 최종 베이스캠프로 정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심에서 떨어진 특유의 한적함 때문이었습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져 있는 많은 산책로, 곳곳에 지정된 자연 보호구역. 20년 가까이 기자를 하며 사람들과 참 많이도 부대끼며 소란스럽게 살아왔는데 이곳에서 잠시나마 고요한 일상을 보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LA 근처에서 단기 연수자들이 가장 몰리는 곳은 아무래도 오렌지카운티의 어바인일 겁니다. USC 학교 등록 첫날에도 제 주소를 보더니 어바인이 아닌 분은 거의 처음이라며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10위 권에 들 정도로 치안이 좋은 데다, 학군과 자연환경 등 뭣하나 빠지는 게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계획도시라 상권과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아파트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도 어바인을 택하는 중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빨간 원으로 표시된 곳이 팔로스버디스입니다. USC를 기준으로 팔로스버디스까지는 대략 47km, 어바인까지는 71km 정도 거리입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두 곳 모두 한 시간 안쪽입니다. 거리 차이는 있지만 어바인에서는 고속도를 곧장 탈 수 있어 그런듯합니다. 반면 팔로스버디스는 구불구불 해안 길과 산길을 지나야 하고요. 물론 출퇴근 시간대에 발목이 잡히면 두 곳 모두 교통지옥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곳 팔로스버디스의 소소한 일상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들어선 고급 주택단지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연수생 신분인 저는 싱글 하우스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작은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지만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의 렌트비는 3천 달러 초반에서 중반으로 어바인과 비교해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지은 지 수십 년 된 구축 아파트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주거비용은 팔로스버디스가 조금 더 높게 느껴집니다. 아파트 크기는 1100스퀘어니까, 우리로 치면 30평 정도로 예상했던 것보다는 컸습니다.
오래 거주한 주민들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각 마을 자치 단체에서 준비한 크고 작은 행사가 자주 열립니다. 승마장이 많은 Roliing Hills에서는 Horse Festival이, 가을 초입 Palos Verdes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무료로 누구나 입장할 수 있지만 가끔 경비 마련을 위해 10달러 정도 되는 티켓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행사는 대부분 주민의 자원봉사로 진행됩니다. 저는 어릴 적 시골에서 봤던 마을 콩쿨(콩쿠르) 대회가 떠오르더군요. 물론 얼큰하게 취하신 어르신들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왠지 분위기는 비슷비슷했습니다. 다들 즐겁고, 흥겹고,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의 끊임없는 웃음소리 등등이요. 이런 행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어린아이들도 축제의 기획부터 진행까지 적극 참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도서관을 찾는 것도 고요한 일상을 즐기는 한 방법입니다. Palos Verdes Library District에서는 모두 세 개의 도서관을 관장합니다. 도서 대여뿐 아니라 종이접기와 다문화 행사 등 아이나 가족들을 위한 이벤트가 종종 열려 주말 한때를 보내기에 더 없이 훌륭합니다. 또 도서관마다 특정 주에는 헌책 판매 행사를 하는데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들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한글책 코너에서는 적지 않은 국내 신간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곳 팔로스버디스가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정말 조용하고 차분한 지역이라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연수생 커뮤니티라든지, 한인 커뮤니티가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혼자서도 잘 노는 분, 매일 똑같은 풍경에도 질리지 않을 분들에게는 안성맞춤이겠지만 도시의 다이나믹한 환경이 맞는 분들에게는 사실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더, 장을 보거나 아이 서점, 백화점이나 한인 마트를 이용하려면 이곳에서 20분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토런스까지 나가야 합니다. 마치 시골에 살면서 장을 보러 읍내에 나가는 것과 같아요. 물론 트레이더조라든지 타겟 등이 근처에 있어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이런저런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 서부, LA를 연수지로 고민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선택지에 넣으셔도 좋을 만큼 팔로스버디스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