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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Episode `인터넷 연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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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 도착해 집을 구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전화를 놓고 인터넷을 연결하는 일이었다. 인터넷 못 하면 시체나 다름 없으니까. 그래서 이삿짐도 다 풀기 전에 일단 인터넷 회사부터 찾았다. 다행히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추천해주는 인터넷 회사가 있었다. 나름대로(알다시피 미국 인터넷은 우리보다 느리다.) 최신식 고속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이른바 COMCAST라는 회사였다.
전화를 걸어 어찌어찌 주소를 가르쳐 주고 나니 그 쪽에서 모뎀을 인스톨시켜 줄까 말까를 묻는다. 그것까지 해 주면 50달러 이상을 더 받는단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는 모뎀이라는 게 뭔지 아리송한 것이었다. 내가 서울서 한국통신 ADSL을 쓸 때와 비슷한 외장 모뎀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이미 내 노트북에 내장돼 있는 모뎀을 말하는 건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뎀을 말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가 귀찮은지 일단은 모뎀을 놓고 갈 테니 만약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라고 한다. 까짓거 어때, 그까짓 인터넷 연결 하나 내가 못 할 줄 알고?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COMCAST 직원이 와서 케이블을 설치하더니 모뎀을 보여줬다. 서울서 쓰던 것과 똑같이 생긴 외장형 모뎀이다. 그런데 웬지 좀 불길한 느낌….나는 직원에게 모뎀을 어떻게 인스톨시키냐고 물었다. 직원 왈 인스톨 서비스는 자신의 일이 아니란다. 그러면서 디스켓을 넣고 나오는 대로만 따라 하면 아주 쉬우니 문제 없다고 말하고는 돌아갔다.

시킨 대로 디스켓(우리말로 하면 모뎀 인스톨 마법사 같은 거다)을 넣었다. 그런데 몇 차례 페이지가 넘어가더니만 곧 무슨 무슨 하드웨어가 없으니 설치하라는 명령어가 나왔다. 거기서부터 도통 이 컴퓨터가 나한테 뭘 요구하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사실 난 상당한 컴맹이다.) 아뿔싸, 안전한 길을 택할 걸! 후회해도 소용 없었다.

다음날 다시 COMCAST로 전화를 걸었다. 돈 더 주고라도 인스톨 서비스를 신청하는게 낫겠다는 판단에서다.
전화 받은 직원은 자기 회사 서비스 센터라면서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여기서부터 나의 고행은 시작된다.

첫 번째 통화.
“여보세요, COMCAST 인터넷을 깔았는데 모뎀 인스톨이 잘 안돼서요. 서비스를 받고 싶은데요”
“COMCAST라구요? 잘못 거신 거 아닌가요?”

두 번째 통화. (다시 전화번호 가르쳐 준 사람한테 걸었다.)
“가르쳐 준 번호가 아닌 것 같은데요…”
직원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거긴 우리와는 다른 부선데 회사 고객센터가 맞으니 다시 한번 걸어보란다.

세 번째 통화.
“여보슈. 당신네 회사 인터넷을 깔았는데 모뎀 인스톨이 안되니 사람 좀 보내 주슈.”
“아, 그러세요? 고객 계좌를 확인하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런 국번은 처음 보겠군요…손님 번호가 등록이 안돼 있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이상하군요 성함이 등록이 안돼 있습니다. 어떤 모뎀을 설치하셨습니까?… 모토롤라 케이블 모뎀이라구요? 모뎀 고유번호가 있지요?… 네. 고객 계좌를…확인이 잘 안되는군요.”
(여기까지 무려 40분이 걸렸다. 미국에선 전화를 받으면 일단 기계가 받고 몇 분을 자동응답으로 처리한 후 사람에게 연결해 준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고객 관련 사항 확인한다고 몇분씩 기다리는 게 예사 일이다. 더구나 미국인들의 업무 처리 속도는 우리에 비해 아주 느리다. 그러니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밖에. 대신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필요한 상담은 자세히 해 준다) “죄송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몇 분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대화가 오고간 후 전화가 다시 홀딩됐다. 잠시 후 이 전화가 다른 사람에게 연결이 됐다. 따르릉. Hello! “아, 사실 제가 인터넷 모뎀 인스톨이 안돼서 댁의 상담요원과 통화중인데 전화가 잘못 연결된 것 같군요.” “그렇습니까? 사시는 곳이 어딥니까?” “LA입니다.” (그 다음에 청천벽력같은 대답이 나온다.)
“LA라구요? 여기는 캐나다 토론톱니다. 저희는 LA에서 서비스하지 않습니다.” OH! My God! “그럴 리가, 댁의 전화번호가 800에…” “800번은 북미 대륙 공통의 톨 프리 국번입니다. 저희는 캐나다의 인터넷 회삽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십쇼”(이럴 수가)

네 번째 통화 (씩씩거리며 따졌다)
“여보슈. 댁이 가르쳐 준 번호가 캐나다 토론토라는데!”
“그럴 리가요.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시죠”
아뿔싸, 내가 그가 불러준 번호 가운데 4를 5로 잘못 받아적은 것이었다. 이전에도 4와 5를 혼동한 적이 있었다. 이런 국제적인 망신이! 내가 누군지 그가 모르는 게 참 다행이었다.

다섯 번째 통화 (이번에는 제대로 걸었다)
“거기 COMCAST 맞지요?”
“맞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댁의 인터넷을 깔았는데 모뎀 인스톨이 안되서요”
“그럼 전화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노트북 켜져 있습니까?”
(이렇게 친절할 수가!) 그 직원은 전화로 하나 하나 인스톨 요령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서울에서도 캠맹이라 우리말로 해도 잘 못알아들을 판인데 그걸 영어로 떠드니. 게다가 내 노트북은 서울서 가져간 것이라 모든 설명이 우리말로 돼 있어서 그가 말하는 영어 메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답답해진 직원은 한국어 통역을 불러주겠단다. (살았다!) 한국어 통역이 연결돼 우리는 3자 통화로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누군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 아파트 관리실 직원이 싱크대를 수리하러 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손님이 와서 통화를 할 수 없네요…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딸깍)

여섯 번째 통화. (벌써 점심 시간이 지났다. 난 아침부터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여보세요. 모뎀 인스톨이 안되는데요…한국어 통역 좀 불러주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한참) “죄송합니다. 지금은 연결되는 통역이 없군요”
“그럼 내일 사람 좀 보내 주세요”
“전화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힘없이)”그래도 일단 스케줄을 잡아 주시구요…제가 나중에 또 걸께요”

일곱 번째 통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안되면 정말 돈 주고 사람 부른다. 50불 아끼려다 이게 웬 생고생?)
“여보세요. 모뎀이 인스톨 안되는데 한국어 통역 좀 불러주세요”
통역이 나타날 때까지 10분 이상이 걸린다. 그 때부터 통역을 사이에 두고 3자 대화가 시작됐다. 직원이 영어로 말하는 내용을 듣다가 모르겠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통역에게 지금 뭐라고 한 것이냐고 묻는 식이다.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도중…핸드폰에서 뭔가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게 웬 일? 살펴봤더니 배터리가 다 된 것이었다. 통화를 잠시 멈추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손으로 더듬어 아무 거나 플러그를 하나 빼고 충전기를 찾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서요. 충전해야 하거든요. 제가 잠깐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는 통화를 다시 시작했다., 장장 한시간 반 동안 통화한 끝에 내 노트북에서 웹 사이트가 씩씩하게(?) 뜨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기분은 감격 그 자체였다. 나는 직원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kindness… and patience”(수화기 저 쪽에서 웃는 소리) “이제 방문서비스 예약은 취소하겠습니다 손님”
나중에 알고 보니 모뎀과 컴퓨터를 연결하는 선이 두 가지가 있는데 내가 처음 내 노트북에 어댑팅 하드웨어가 없는 라인을 꽂은 것이었다. 그리고 한글로 된 운영체계 안에서는 미국 인스톨 프로그램이 잘 안 돌아간단다. 그 날 전화 통화한 시간을 모두 합해 보니 무려 4시간! 통화가 끝난 시간은 오후 3시 반 쯤이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 날 이후로 전화 통화에 훨씬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