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상남언론재단

"영상보도에 대한 사회적 인식변화와 적응 연구" 란 연수주제를 가지고 미국의 미주리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1년동안 뭘 배울 수 있을까 라는 주변의 이야기도 많이 있고 저 스스로도 '정식학위코스가 아닌데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지' 다소 의문이 들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렇지만 쉽게 정한 주제는 아닙니다.

상당히 오랜기간을 연수주제를 놓고 고민했었습니다. 구체적으론 3년전부터 조금씩 정리를 하고 있었고 사실은 사진기자로 신문사에 첫 발을 내딛던 13년전부터 늘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던 고민이었습니다.

영상보도-여기선 사진으로 개념을 좁히겠습니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신문을 읽는 독자들이 사진을 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 독자들에게 신문사진이 끼치는 영향, 다시 말해 사진이 신문지면에서 갖는 의의 같은 것이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진을 생산, 공급하는 사람들, 즉 사진기자들(광범위하게 보면 사진을 다루는 편집자들과 디자이너를 포함시켜야 겠죠)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사진에는 자체적인 정보(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리적인 측면의 '정보' 외에 '느낌' 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정보(메시지)와 느낌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생성되어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다만 사진의 장르에 따라 정보와 '느낌' 이 각각 더 강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사진은 좋은 기사와 마찬가지로 정보와 감동을 줍니다. 좋은 사진이란 것은 독자에게 계량화되고 수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단치도 않은 기자의 별 놀라울 것도 없는 연수주제 이야기라 저의 글을 보시는 분들이 지루해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찍어 신문에 실었던 사진 한 장과 그 뒷 얘기를 예로 들어 사진에 대한 "사회적 인식변화와 적응 연구" 란 연수주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이화여대 합격자 발표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외적인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중년 남자가 여학생의 손을 끌고 가고 있다" 사진설명을 보면 조금 도움이 됩니다. "날짜와 장소, 그리고 불합격해서 풀이 죽은 딸의 손을 잡아 끌고 있는 아버지" 그래도 별다른 정보는 없어 보입니다. 이 사진한장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대학입학제도가 바뀌었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사회적 반향이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무렵 이 사진을 본 많은 학부모들이-자녀가 합격했던 지의 여부와 관계없이-공감의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이 사회는 대학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대학에 가겠다고 공부해온 우리 주변의 많은 수험생들 중에서도 게시판에 이름이 없는 쪽이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신문에는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은 그 사진에 대한 취재기의 요약입니다.
[힘들여 연출할 필요가 없을 때 난 참 행복했는데 이 날이 그랬다. 얼싸안고, 자기번호를 가리키며 펄쩍 뛰고, 옆에 있는 엄마, 아빠의 축하를 받고, 혼자 온 어느 아버지는 실성한 사람처럼 '됐다. 이제 됐다.'를 연발하며 뛰어다니고, 친구들끼리 온 한 그룹은 알아서들 헹가래를 치고 있고, 한마디로 그림 투성이였다.

물론 그렇다고 실력부족인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찍을 수는 없다. 얼싸안으니 뒤통수가 보이지. 펄쩍 뛰는 모습은 어딘가 합격자 발표치곤 '오바'하는 것 같지, 엄마, 아빠의 축하를 받는 것은 너무 흔하지, 헹가래치는 녀석들은 너무 빠른데다가 군중 속에 가리기 일쑤지. '역시 연출사진이 깔끔한 법이야' 혼자 쓴웃음을 짓고 있으니 과연 다른 사진기자들이 한 합격자와 가족을 붙들고 연출을 하고들 있었다.

그물로 훑어가듯 군중 속을 미끄러지던 나의 렌즈 속에 가끔 고개 숙인 모습들이 보였는데 '떨어지면 저런 상태가 되는 구나'싶기도 했다. 여학교라 그런지 우는 학생들이 꽤 있었는데 좋아서 우는 건지 떨어져서 저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있어야지.

저 멀리, 3백밀리 망원보다 더 먼 곳에 여학생 둘이 주저앉아 우는 광경이 눈에 들어 왔다. 확실히 떨어진 학생들이란 느낌이 있었으나 찍을 수가 없었다. 갈등을 거듭하다 아주 멀리서 몰래 몇 장 눌렀는데 (들킬까 겁이 나서) 다행히도 자리를 뜨고 있었다. 계속 앉아 있었더라면 무슨 일이 났을 것이다. 찍다가 들켜서 눈물 맺힌 어린 여학생의 원망 어린 눈총을 받거나 못 찍고 돌아와서 '난 안돼..' 하며 하루종일 자책하거나(아마 후자겠지).

'기분 좋게 현장을 떠나는 것도 중요한 거야' 라고 자위하면서 운동장 동쪽으로 걸어나오는데 불행하게도 또 한 팀의 확실한 불합격자가 있었다. 서 있는 아버지와 앉아 있는 수험생 딸이었다.

길었던 1년 동안 노력해온 결과가 게시판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보는 너무도 짧은 순간에 허망하게 판가름나버린 아버지와 딸이었다. 짧은 겨울 해가 서쪽으로 향하면서 바바리 코트를 입고 담배연기를 풀풀 허공에 날리는 아버지에게 그림자를 달아주고있고 땅속으로 숨어들어 갈 듯 주저앉은 딸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허리춤으로 사진기를 내려 몇 장 누르고 뒤로 접근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원망 섞인 눈총이 아니라 아무소리 못하고 얻어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떨어졌는데 사진기 들이대면 누가 좋아할까' 숨죽여 가며 그들의 대화가 들리는 거리까지 접근했다. "이제 그만 가자" 달래는 아버지와 "싫어요" 계속 흐느끼는 딸의 모습이 뒷모습이나마 찍을 수 있는 거리가 됐다. 찰칵...

"집에 가자, 그만해라" 싫다는 딸의 손을 이끌고 걸어가는 아버지도 일년동안 정성을 들여온 그 어느 수석합격자의 부모 못지 않게 자식의 합격을 소망했을 것이고 고개 숙이고 끌려가는 딸도 학교수업 충실히 했을 것이다. 다만 실력 없고 운 없는 사진기자인 나처럼 실력이 좀 약했고 운이 너무 없었을 뿐이다.

입사한 뒤로 상 한번 받은 적이 없었던 나는 불합격한 수험생 딸과 아버지의 사진 한 장으로 수없이 많은 상을 받았다. 신문이 나온 날 아침에 전화를 걸어준 중년의 아저씨가 "밥상머리에서 그 사진을 보다가 너무 공감해서 전화했노라..."며 축하해 준 것은 나중의 일이었고 회사를 들어서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사진 처음 봤다. 대단한 발상이다.",
"역시 네가 해내는 구나",
"작품이 따로 없더라" 등등 아주 사람의 혼을 빼더니만 계단을 올라와서 또 마주친 회사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야..." 하기에 내가 먼저
"대단한 것도 아닌데.."하니까
"야...백원짜리 동전 좀 빌리자. 커피 뽑게. 그런데 무슨 소리냐? 대단치 않다고?"라는 바람에 겨우 제 정신이 들었다.

그래도 하루종일 거의 모든 편집국 동료들(커피값 빌려간 사람 빼고)이 나를 볼 때마다 사진 좋다고 돈 안 드는 칭찬에 인색치 않았고 독자들의 전화도 계속되었다고 한다(배달사고 따지는 전화 빼고). 그것이 나에게는 더없는 상이었다. 사진기자회에서 주는 이 달의 보도사진상에 출품해보라기에 했더니만 심사기준 근처에도 안 갔다고 한다. 전문가가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비전문가인 독자들이 좋다고 하니 나도 그냥 '좋은가?'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사진기자들은 어느 나라의 기자들보다도 더 열심히 현장에서 취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지면에 실리는 사진들이 과연 독자들에게 얼마만큼의 정보와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독자들과 사진기자들간의 괴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들이 과연 어떤 신문사진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진기자들은 어떤 사진을 취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고민을 하는 것이 제가 1년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하려는 이유입니다. 각자 국가와 분야가 다르지만 저와 비슷한 시기에 LG상남언론재단의 지원으로 연수를 떠나는 나머지 9명의 기자들에게 건투를 빕니다.